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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보들 실뭉치 ㅣ 보리 어린이 그림책 12
김효정 지음 / 보리 / 2022년 3월
평점 :

싱싱해 보이는 초록빛 잎사귀 아래에 도로롱 매달린 누군가의 초록집과 보들보들한 실뭉치 하나가 놓인 표지를 보고 있자니 무슨 이야기를 돌돌돌 감아놓았는지 궁금해집니다.
이 보들보들한 실뭉치를 돌돌돌 풀어가면 이야기를 만날 수 있을까요?
그림책 <보들보들 실뭉치>를 따라 이야기를 만나러 가보겠습니다.

도로롱 도로롱.
작은 도롱이벌레 한 마리가 단잠을 자고 있네요.
자기 몸에 딱 맞는 집에서 편안히 자는 모습이 평화롭고 귀엽네요.

그런데 어라!
꼼지락거리며 일어나다가 그만 집을 바스락하고 부숴버리고 말지요.
도롱이벌레는 속상해하고만 있지 않아요.
새로운 집을 짓기 위한 재료를 찾으러 떠납니다.

그러다 발견한 보들보들한 실뭉치 하나.
털실의 보드라움에 반해 새집을 짓기 시작합니다.
싱싱한 잎사귀를 넉넉하게 담아두고, 잠자기 전 뒤척이기에 충분하고, 오늘처럼 집을 부수지 않도록 이것저것 고려해 짓다 보니 만드는 시간도 크기도 상당해졌지요.

그런데 가만 보니 커도 너무 큰 게 아닌가 걱정이 되는데요.
과연 도롱이는 보들보들 털실로 지은 집에서 전처럼 잘 잘 수 있게 될까요?
자기 주변의 재료로 집을 만들고 한 자리에 오래 머무르는 주머니나방 애벌레.
도롱이의 정체를 저는 이 그림책 덕분에 알게 되었는데요.
이제 산책하다 만나면 더 반갑게 바라볼 것 같습니다.
이 친구는 어떤 재료로 만든 집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지내고 있는지 또 어떤 꿈을 꾸고 있는 걸까란 생각을 하면서 말이죠.

잠을 자고 꿈을 꾸는 자기만의 공간을 스스로 만들고 부수어져도 다시 털고 일어나 새집을 짓는 씩씩한 도롱이.
내부에서 일어난 성장의 결과로 구축해놓은 내 공간이 부수어질수도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제게는 마음을 쿵하게 했는데요.
내가 나를 침범할 수도 있다는 게 당연하고도 신기했거든요.
어쩌면 지금까지 부수어졌다는 결과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고 있었구나 싶어 눈이 떠지는 기분이었어요.
다음을 위한 시작과 출발을 위해서는 파괴의 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려줘서, 성장과 변화를 마주하는 도롱이의 자연스러운 꿋꿋함이 기특하고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합리성이나 편의성을 따져가며 점점 더 커져가는 도롱이의 집을 보면서 우리들이 사는 집의 모습을 떠올렸는데요.
한숨이 포옥 나오면서 자기 몸에 딱 맞는 집을 마침내 찾아낸 도롱이가 부러워지더군요.
욕심도 허세도 낭비도 군더더기도 없이 딱 맞아 떨어지는 편안한 자기만의 공간에서 도롱도롱 꿈을 꾸며 성장할 수 있다면 좋겠다 생각해 봅니다.
저도 이제부터 '꿈은 크게'보다 '꿈은 나한테 딱 맞게'로 꾸려고요.
그러다 부숴지면 툭 털고 일어나 이 모든 게 당연하다는 듯이 나한테 딱 맞는 새집을 지을 거예요.
마지막 작가의 글을 보고나니 이 책이 작가님이 잠 못들던 밤에 매달려 감았다 풀었다 했던 보들보들한 이야기뭉치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도롱이가 남겨둔 보들보들 실뭉치가 다음 친구에게로 전해졌듯이 작가님이 전해주는 이 보들보들 실뭉치 같은 그림책이 누군가에게로 전해지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