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
반다나 싱 지음, 김세경 옮김 / 아작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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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와 SF를 많이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인도 출신의 페미니스트 SF작가는 처음!

지금까지 본 작품들에서는 보지 못한 새로운 뭔가를 접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갖고 시작한 반다나 싱의 작품집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

이 공간에서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가는 몇 작품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곳이 인도인지라

낯선 인도식 이름과 인도의 풍경이 자아내는 색다른 공간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래서 현재의 인도 자체가 우주의 어느 시공간만큼이나 낯설게도 무한하게도 느껴진다.

그렇기에 반다나 싱의 작품에서 공간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우리가 존재하는 곳 또는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 곳.

그리고 그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존재들.

그녀의 작품들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이자 특징은

그 공간과 그곳에 있는 존재들의 이야기라는 데 그 함의가 있다.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는 총 10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그 중 공간이 갖는 의미가 두드러지는 작품으로 다음 세 작품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델리에서 과거와 미래의 델리를 그리고 유령 같은 존재들을 볼 수 있는 남자의 이야기 '델리',

유년 시절부터 수호천사 파리쉬테를 보고 무한을 보고 싶어하지만,

무슬림과 힌두교의 정치적, 종교적 분쟁에 휘말려 누나를 잃고 친구마저 위험에 빠지게 되는

천재 수학자 압둘의 이야기 '무한',

화성에서 다른 차원으로 가 다른 존재를 만나고 돌아온 남자의 이야기 '보존 법칙'.

'델리'와 '무한'은 인도만의 고유하고 독특한 정서, 역사, 그리고 정치적, 종교적 상황을 보여주고

'보존 법칙'에서는 우주와 우주가 교차하는 곳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중 '무한'은 수학자, 철학자, 시인들의 이론과 철학 그리고 문학 작품이 등장해

단조롭고 추한 세상을 벗어나 수(數)라는 무한을, 우주라는 무한을 꿈꾸는 압둘의 꿈을

아름답게 지지하고 그의 슬픔은 그만큼 더 밀도가 높아진다.

다음 작품들에는 인도에서 여성의 지위와 차별의 현실에 대해 작가가 페미니스트로서의 발언을 담고 있다.

하인의 시아버지인 노인의 죽음으로 허기지고 잊힌 자들을 감지하는 능력이 생기는 여자의 이야기 '허기'와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하는 아내와 이를 숨기려는 남편의 이야기 '자신을 행성이라 생각한 여자',

자신이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 가는 여자의 이야기로 클림트의 물뱀이 떠오르는 작품 '갈증',

뉴델리의 도로 한복판에 나타난 사면체가 일으킨 소동 그리고 그 사면체의 정체를 알고 싶어한 여자의 이야기 '사면체',

이혼을 하고서 아내라는 존재를 벗어가기 시작하며 다른 차원, 다른 공간으로 여행을 시작하려는 여자의 이야기 '아내'.

여기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불합리한 현실을 떠나거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뚫고 해결하려고 한다.

현실은 비참하지만 때론 우습고 통쾌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 그녀들의 이야기이다.

다음 두 작품에서는 환경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드러난다.

은하수에 존재하는 세 행성의 세 가지 신화 이야기, '은하수에 대한 세 가지 이야기: 성간 여행 시대의 신화들',

우기의 시작과 함께 찾아온 특별한 조각가와의 만남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10대 소녀의 이야기 '다락방'.

흙과 돌 그리고 나무.

태초의 시작, 우주의 시작, 생명의 시작에 빠지지 않는 아니 빠질 수 없는 것들.

우리의 시작인 자연에 대한 관심이 반영되어 이들을 소재로 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준다.

반다나 싱의 작품들에는 분명 다른 점이 있다.

그녀의 작품들이 갖는 차별성은

작가 자신이 인도 출신이라는 점, 여자라는 점, 페미니스트라는 점, 환경운동가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매우 불리할 수 있는 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것을 역으로 이용할 줄 아는 영리한 사람이다.

이 작품집의 가장 처음 나오는 '허기'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세상이 매우 기이하다는 그녀의 깨달음을 SF는 그 어느 때보다 잘 반영하는 듯했기 때문이다.

SF 소설은 무척 난해한 방법으로 위대한 진실을 말하고자 한다는 걸, 문학에 심취한 속물들을 속이고

무심한 독자들을 불러 세우기 위해 설계된 일종의 암호라는 걸, 그녀는 서서히 이해하게 되었다.

외계인을 만나기 위해, 혹은 몇 광년 떨어진 사람들 간의 거리를 재기 위해,

구태여 우주로 나가야 할 필요는 없었다.

그것이 그녀가 일생을 바쳐 풀어야 할, SF가 말하고자 하는 위대한 진실이었다.(36쪽)"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이상하다 생각해 본 적이 있는 당신이라면,

반다나 싱이 설계해 놓은 이 SF라는 암호, 위대한 진실을 한번 풀어보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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