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동물원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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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머리말에 실린 저자의 글을 보면서

시작부터 나는 켄 리우의 팬이 되고 말았다.

글에서 문장에서 작가의 어떠함이 드러나게 마련인데

이렇게 매력적인 작가라니 그의 작품 자체도 그러하지만

켄 리우란 사람 자체도 너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올해 이 책을 만날 수 있었음에, 켄 리우를 알게 되었음에 감사하며

그의 단편집 <종이 동물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머리말부터 나를 감동시키더니

첫번째 단편이자 단편집의 제목이기도 한 '종이 동물원'은 눈물을 쏙 빼놓는다.

이 어머니의 사랑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종이 동물원'에서 시작된 부모와 자식 같의 혹은 전 세대와 다음 세대의 사랑과 갈등은

그의 작품 곳곳에서 발견된다. 아마 변화의 흐름 안에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가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 겪어나가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이보그화 되는 구미호와 과학에 밀려

설 자리를 잃은 퇴마사가 등장하는 SF판 전설 ‘즐거운 사냥을 하길'에서는

퇴마사인 아버지와 아들, 구미호인 어머니와 딸이 등장해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뮬라크럼'에서는 증강현실의 발전된 형태를 개발한 아버지와 딸의 갈등이

실제와 상상, 그리고 보는 것과 보이는 것의 문제로 확장된다.

SF버전의 창세기이자 인류 진화의 미래를 보여주는 '파(波)'에서도

'부자연'스러운 금속 인류가 되어가는 아들을 보며 통곡하는 어머니 매기가 나온다.

'옛것이 다시 새것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지.[파(波), 358쪽]'라는 문장에서 읽히듯이

켄 리우는 이 단편에서 다양한 창세 설화와 신화라는 옛 이야기가 다시 새로운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가능성과

전통과 현대 그리고 미래가 어떻게 순환이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켄 리우가 주목하고 있는 또 하나의 주제는 개인과 역사라는 이야기다.

센틸리언이라는 거대 기업이 사용자들의 데이터를 축적해 모든 것을 합법적으로 조정하는

가까운 미래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천생연분',

더 이상 개인의 사생활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는, 개인의 선택이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우리가 보인다.

딸을 잃고 감정 조절 장치인 레귤러 없이는 생활이 힘든 사립 탐정 루스 로가 살인 사건을 해결하는 '레귤러'.

'이것이야말로 정상적인(regular) 세상의 모습이다. 명쾌함도, 구원도 없다. 모든 합리성의 끝에는 그저 결정을 내려할 순간과 품고 살아가야 할, 그러면서 견뎌야 할 믿음 뿐이다.[레귤러, 305쪽]'

개인이 살아가는 정상적인 세상의 모습이란 이렇다.

선택되어 살아남은 1021명의 지구인이 타고 있는 호프풀(희망)호에 문제가 생기고

이를 해결하려는 유일한 일본인인 히로토의 선택을 그리고 있는 '모노노아와레'.

한 개인의 선택은 역사를 바꾼다.

이와는 다르게 역사 속의 한없이 힘없는 개개인들의 모습을 담은 작품과

피할 수 없는 거대한 파도 같은 역사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작품도 있다.

냉전 시대에 미국과 중화민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상대로 벌인 합동 비밀 작전을 모티브로 한 '파자점술사',

만주족이 중국 정벌 과정에서 벌인 양주 대학살을 담고 있는 '송사와 원숭이 왕',

731부대와 위안부 문제를 다루고 있는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동북아시아 현대사에 관한 다큐멘터리'.

'진정한 기억 없이는 진정한 화해도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억이 없었기 때문에 양국의 국민 개개인은 희생자의 고통을 공감하지도, 기억하지도, 체험하지도 못했습니다. 우리가 역사라는 함정을 넘어 앞으로 나아가려면 먼저 우리 개개인이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스스로에게 들려줄 수 있는, 개인화된 이야기가 필요합니다.[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 531쪽]'에서 이야기하듯이 그런 이유로 작가는 역사라는 이야기를 작품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태평양 횡단 터널 약사(略史)'에서는 횡단 터널을 만들기 위해 끌려 온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던 선택으로 인해 고통 받는 한 개인이 그 비밀을 깨려는 선택을 하게 된다.

은폐되고 왜곡된 역사를 그로 인해 여전히 고통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신 전달하고 있는

작가의 뜨거운 마음이 절절히 느껴진다.

마지막 작가의 관심사, 책 그러니까 이야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파(波)'의 온갖 종류의 창세 신화와 설화,

개개인마다 양상이 다른 몸의 상태 변호가 시와 소설 그리고 전설집을 만나

하나의 러브 스토리가 되는 '상태 변화',

우주의 모든 지적 생물종이 이야기를 책으로 만드는 이야기인 '고급 지적 생물종의 책 만들기 습성',

중국의 고사와 서유기가 등장하는 '송사와 원숭이 왕',

그리고 역사 속의 참혹한 면면들을 담아낸 '파자점술사', '송사와 원숭이 왕',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동북아시아 현대사에 관한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이야기 속의 이야기들이 환상과 SF를 만나 말 그대로 새로운 이야기가 되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신화와 귀신 그리고 과학과 법률, 역사와 개인의 이야기가

하나의 거대한 우주를 이루고 있는 켄 리우의 단편들.

그는 글로 표현하는 시각 이미지와 정보 그러니까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그 둘을 돋보이게 하는지를 너무 잘 아는 것 같다.

또한 그는 시종일관 언어와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그의 소설이 갖는 힘이자 특징으로 보인다.

어쩌면 가장 진보된 형태의 소설인 SF에서 이야기의 힘을,

그 가능성과 미래를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이렇게 세련되고 지적인 옷을 입을 인간적인 SF라니

게다가 그 안에는 살아있는 이야기가 우주의 별들처럼 아름답게 펼쳐있다.

'켄 리우' 이 작가의 이름을 꼭 기억해 두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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