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기독교 역사 - 악당인가 성자인가, 회복을 위해 마주해야 할 역사 속 기독교
존 딕슨 지음, 홍종락 옮김 / 두란노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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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되돌아 볼때 우리는 주로 역사의 보고싶은 면만 보고싶어하는 성향이 있다.

그리고 많은 크리스찬은 기독교의 역사의 앞에서 아무말을 하지 못하거나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이면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넘어진 역사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에게도 이 기독교의 쓰라린 부분들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넘어졌을때 무엇때문에 넘어졌는지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어떤 점들이 넘어지게 하는지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어떤 마음 이셨고, 어떻게 해야하는지 아는것처럼 우리가 기독교 역사가운데에 실패한 역사와 어두운 역사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알아야 오늘날 우리는 다시한번 역사를 반복하지 않을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은 사실 기독교 역사에서도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십자군 전쟁부터 다루고 있다. 십자군 전쟁은 우리는 흔히 기독교와는 무관하고 욕심있는 사람들이 저지른 행위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역사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십자군 원정에 관한 일차 자료를 읽다보면, 그곳에 표현된 강력한 종교적 동기 및 목표와 맞닥뜨리게 된다." (32)

그들은 사제들이었고 그들의 신앙에 의하여 표현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정말 신앙의 마음으로 회개와 연합이라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작은 교회의 연합을 꿈꾸게 하였다.

그래서 그 사제들은 마가복음 8장에 자기를 부인하라는 이야기를 전쟁에 참여하는데에 그 명분을 사용했다.

"오늘날 기독교 인들은,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은 제자들이 그분의 대의를 위해 죽음까지 각오하고 기꺼이 핍박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이 말씀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대의를 위해 '싸워야'한다는 뜻이 아님은 틀림없다. 그러나 11세기 프랑스에서......가장 좋아하는 해석은....그리스도의 적들에 맞서 싸우는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35)

그러나 본문을 막상 살펴보면 그러한 본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을 이 책에서는 그분의 가르침의 중심이었다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예수님을 따라서 이러한 상황때에 맞이해야하는 태도를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을 비추어 준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원수 사랑하심'을 본다. 하나님은 자격없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대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70)

그렇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타인을 죽게하는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죽으심을 통해서 원수사랑을 드러냄을 보아야한다. 우리는 희생보다는 생존을 택하고 있고, 원수 사랑보다는 원수 대적을 택하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의 사랑은 죽으심으로 확증이 되었다...(롬 5:8)

나의 사랑은 상대를 위한 희생과 죽음이 있나...? ..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다... 내 말이 맞다는 생각이 한켠에 있었따. 이 맞는 말을 들어주지 않았음에 서운했고.. 사랑은 희생과 죽음에 직결되어 있는데, 내 사랑이 많이 부족했다는 생각을 한다... 예수님께서 남기신 유산을 나는 다시금 나의 의로 돌리려고 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 6:35-36)

요즘 계속해서 그런 메시지를 주시는 것이 계속해서 나를 돌아보게 한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고 있는가? 나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가?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

# 애통과 위로

이사야서에는 "애통(슬픈)"하는 사람들을 "위로함"에 대한 구절이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산상수훈과 연결이 된다. 이것은 우리 삶에 주기적으로 슬픔을 주는것이 아니라 이사야 61:8 에 보면 무언가 하나님께서 조치를 취해주시기를 바라는 요청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 다른 사람들의 부도덕을 볼 때 보이기를 기대하셨던 반응은 '슬픔'이다....심판을 일삼는 태도가 아니다. 자신의 도덕적 가난함을 먼저 보고 그 이후에야 다른 이들의 "도둑질과 모든 악한 짓"을 슬퍼하는 겸손한 비애다." (89)

#자선

기독교가 국가가 되면서 부자가 성직자가 되는것이 힘들어졌다. 그리고 부자와 성직자는 구별이되고 자선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다.

"부유한 시민들은 국가의 문제를 챙겨야 하고, 기독교인들은 가난한 자들을 계속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150)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기 목에 큰 맷돌을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나을 것이다." (눅 17:2)

이 책에서는 계속해서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잘 못한 것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기독교에서 벗어난 세속주의의 영향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저자는 이것을 균형있는 시각으로 보기를 요청하고 있다.

"교회를 욕하는 것이 현대의 회의론자들 사이에서 하나의 예술 형식이 되었다. 세속 사회는 자신이 인류 공통의 증오와 폭력에 참여한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종교재판소의 사악함은 제대로 꾸짖지만 계몽주의의 "덕스러운 공포"는 못본 체한다. 인류를 갈라놓는 종교의 힘의 전형으로 북 아일랜드 분쟁을 제시하지만 그 사건이 모든 사람안에 도사리고 있는 부족주의에 관해 실제로 말하는 마에는 주목하지 못한다." (472)

그렇다 우리는 주목된것만 보는 시야가 있지 양쪽을 균형있게 바라보는 시각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 우리속에는 누구나 다 들보가 있다. 내 안에 있는 들보를 먼저 잘 바라보자.

그리고 어떤 의인도 하나님 앞에 미치는 모든 의 앞에서는 우리는 죄인이며 차별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독교의 복음앞에서 알게되는 것은 우리의 타락한 자아를 인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덜 심판하는 자세를 가지게 될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는 자기를 깨끗하게 생각하고 가지려는 성향이 있다. 이것을 우리는 바라보지 못하고 지나가고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할때에 우리는 담대하게 정죄를 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나도 나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말을 했었던것 같다.

"우리 인류를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 모두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더 잘 인정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 것뿐이다."(474)

#결론_ 서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사랑에 속해 있으면서도 나의 정체성을 부인했던 모습을 생각해보게 된다. 내가 지금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는 이 행동이 과연 맞는 것일까?

이 책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라는 종교는 부인하지만 기독교라는 가치는 누구나 쓰고있다는 사실이다.(참고 톰홀랜드의 도미니언, 앤드루 리의 책)

"대부분이 아직도 고통을 가하는 것 보다 고통을 겪는 것이 고상한 일임을 당연하게 여기는 주된 이유다. 이것이 대체로 우리가 모든 인간의 목숨은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도덕과 윤리 면에서, 내가 그리스도인도 로마인도 아니고 철저히 기독교인임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479)

#두란노 #존딕슨 #벌거벗은기독교역사 #서평 #기독교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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