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트 - 왜 혐오의 역사는 반복될까
최인철 외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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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셀마에서의 대행진 이후 반세기, 아니 이미 200년 전 링컨의 위대한 연설과 함께 미국 역사상 가장 추악한 제도가 폐지되었음에도 피부색은 미국을 가르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였다. 알게 모르게 내재되어 있던 인종 간의 갈등, 정확히는 특정 인종을 향한 특정한 마음은 계속 조금씩 불거져 나오고 있었고 마침내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으로 행동을 표출시켰다. BLM, Black Lives Matter 운동의 시작이었다.

BLM이 미국 사회를 물들였던 것은 미국에 만연한 혐오의 감정과 더불어 어쩌면 인간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필연적으로 숨어 있는 비틀린 시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신호였다. 왜냐하면, '미국'이라는 국가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백인'의 '흑인'에 대한 시선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이라 칭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냐면, BLM 운동의 주체 그 자신들이었다. 다분히 폭력적인 성향으로 변질되어 가는 시위의 한 가운데에서 흑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대상인 '백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노란색'을 혐오했다. 그리고 곧이어 발발한 코로나 시대 속에서 중국인을 위시한 동양인을 향한 무차별적인 혐오와 폭력은 마침내 도를 넘어섰다. '혐오'를 받는 대상조차 '혐오'를 쏟아낼 대상을 끝없이 찾는 '혐오스러운' 혐오의 사슬. 인류 최악의 모순이자 본성이었다.

'헤이트'. 영단어를 익힐 때쯤이면 누구나 알게 되는 그 가벼운 단어. 우리의 교과서 속에서 그 단어는 얼마나 가볍고 낭랑하게 쓰였던가. 영어를 썩 잘하지 못해 문맥과 행간 속에서 '헤이트'가 얼마나 파괴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느껴본 적은 없건만 hate가 '혐오'로 의역될 수 있음을 생각하면 마음에 근원적인 '혐오감'이 드는 듯하다. 그리고 오늘, '헤이트'로 이토록 많은 이야기를 쏟아낼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고 동시에 불편하다.

<헤이트>는 '혐오의 시대'가 된 혐오 만연의 대한민국, 나아가 혐오주의의 세계를 심리학적으로 면밀히 분석한다. '프레임' 등으로 이름을 알린 최인철 교수 등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분야에서 저명한 다수의 학자가 진심으로 우리 시대의 혐오를 진단한다. 기원전부터 존재했던 반 유대주의, 인종주의의 극치였던 '아리아인'들과 아우슈비츠, 그 이름에 혐오를 품은 아파르트헤이트, 그리고 오늘날 익명성을 든든하게 방패로 삼은 인터넷 속 '대 혐오 시대'에 이르기까지. '혐오'를 그토록 증오하면서 어째서 인간은 혐오를 떼어내지 못할까. 혐오는 역사는 참담할 정도로 '장구'하며 심지어 시대에 맞게 탈을 바꿔 증식하고 변신했다.

'집단'은 혐오를 낳는 대표적인 가족이자 괴물이다. 집단에 대한 관심이나 애정은 과도한 수준에 다다를 경우 다른 집단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낸다. 이내 혐오라는 변질된 감정이 되어 이제껏 존재했던 수많은 참사를 낳았다. 코로나19는 집단 간의 유대감을 더욱 증폭시켰다. 다른 집단과의 교류를 최대한 멀리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집단을 보호하고자 하는 욕망을 스스로 키워야만 했다. 2019년 이후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증오 범죄는 집단적인 관점에서 상당히 설명된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전히 기득권 층은 지역, 성별, 직업 등 다양한 집단적 요인을 통해 세상을 갈음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마음에 차곡차곡 쌓아올린 타 집단을 향한 혐오의 감정이 시도 때도 없이 세상을 스민다. 성장하고 있는 세대는? 본인 또한 어느새 탑재된 '혐오감'을 스스로 깨닫고 놀란 경우가 적지 않다. 이처럼 혐오는 인간의 사회적인 특성 속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세력을 넓힌다.

무제한에 가까운 자유를 쥐여줬더니 무제한에 가까운 도덕적 위기에 봉착했다. 인터넷은 바야흐로 대 혐오 시대이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손발이 맞는 세력과 함께 혐오의 감정을 마음껏 쏟아낸다. 무엇이 혐오감을 증폭시키는 것일까? 정말 모든 이의 마음속엔 '선한 천사'보다 '시기의 악마'가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단 말인가. 인터넷 시대에 맞춰 새 단장을 한 '혐오'를 전문가들은 상당히 우려스럽게 바라본다. 익명성 뒤에서 당당히 증오의 감정을 조장하는 혐오는 현시대의 학자들이 반드시 연구해야 할 대상이며 또한 수많은 개인이 함께 고민해 봐야 할 주제이다.

BLM이라는 거대한 운동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스스로 모순성을 공개한 흑인들을 보며 오래도록 분노했다. 그러나 퍼뜩 다른 생각에 잠겼다. 우리 또한 혐오의 대상이 될 때와 혐오를 할 때의 모습이 다르지 않던가. 적어도 수차례, 길거리에 마주친 먼 나라에서 온 낯선 이들을 '묘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바라본 적이 있었다. 혐오하는 것은 쉽기에. 혐오를 혐오한다는 것은 대상자로서의 불쾌감을 뜻하는 말이었던가. 온갖 모순으로 가득 찬 '혐오'의 고리. 인간 도덕의 본질을 시험하는 혐오는 그렇기에 깊고 넓게 그리고 진중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혐오를 혐오하는 인간이 혐오스러운 지금, <헤이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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