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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허리 가우디의 뼈 - 탐정이 된 의사, 역사 속 천재들을 진찰하다
이지환 지음 / 부키 / 2021년 9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6년 이상의 긴 시간 동안 하루 3~4시간의 잠자는 시간 빼고는 오롯이 벽돌 책에 얼굴을 파묻고 있어야 가능한 '의사'라는 이름.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작은 책상 하나를 두고 마주하고 있는 환자는 온통 '그냥', '약간', '그쯤', '~ 같아요'라는 애매모호한 이야기를 쏟아내고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의학적 지식은 너무나 많다. 지긋이 아픈 배를 부여잡고 온 환자에게 내릴 수 있는 진단명은 족히 수백 가지는 되리라. 그렇다고 환자에게 구체적이고 의학적으로 도움이 되는 증상을 말하라 할 수도 없다. 스스로 돌파하는 수밖에.
의사는 탐정과도 같다. 경찰보다는 셜록 홈스 같은 바로 그 탐정에 가깝다. 다만 사람의 몸을 무척이나 잘 알고 있다는 점만 다를 뿐. 환자의 첫 마디만 듣고서 떠오르는 병명은 대략 수십 가지, 이제 환자의 식습관을 물을 차례다. 직업은 무엇인지. 최근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일은 없는지. 큰 병이 아니라면 이쯤에서 보통 유력한 용의자이자 병명이 나오지만 가끔 끝까지 버티는 녀석들이 있다. 그땐 사돈의 팔촌까지 가족력을 캐묻고, 술 담배, 어릴 때 앓았던 요상한 병까지 캐묻는다. 그리고 마침내 밝아오는 머릿속. 찾았다. 환자를 괴롭히는 병이 무엇인지를!
이쯤 되면 의사라는 직업이 대단해 보일 뿐만 아니라 어쩌면 흥미로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아서 코난 도일은 환자가 많지 않은 병원의 의사였던 덕분에, 환자를 진찰하며 샘솟은 자신의 지적 호기심과 흥미를 셜록 홈스로 옮겨냈다. 대중의 인기를 끌 수 있는 교양서나 탐정 소설이 아니어도 의사들이 추리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은 또 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환자를 진단하는 것. 바로 역사 속에서 스러져간 위인들을 '진짜' 병명을 추정해 보는 것이다.
<세종의 허리 가우디의 뼈>는 세종, 가우디, 모차르트, 마리 퀴리 등 변변한 의료 기록 하나 남기지 않고 세상을 홀연히 떠난 인물들을 '탐정'처럼 살펴본다. 세종이 정말 고기만 즐기고 몸을 통 안 움직여서 당뇨에 걸렸을까? 재위 후기 눈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당뇨 합병증 같기도 한데? 조선이 낳은 최고의 천재 세종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저자는 조선왕조실록을 샅샅이 뒤진다. 세종이 이리 아프다고, 저리 아프다고 하여 남긴 12번의 기록을 모두 찾아 세심한 추리를 시작한다. 도스토옙스키가 느꼈던 '환상적인' 느낌을 일종의 '신의 계시'가 아니라 의학적으로 진단한다. 무엇이 그를 '지랄병' 환자로 만들었던가.
거리를 걷다 전차에 치여 쓰러진 가우디. 사람들은 천하의 가우디가 다 헤져가는 양말을 두 겹씩이나 신고 부랑자에 가까운 옷차림일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가우디는 그런 남루한 옷차림 때문에 제때 치료받지 못했고 3일 만에 사망한다. 어쩌면 가우디를 최종적인 죽음으로 몰아갔을지도 모르는 그 궁색한 옷차림은 실은 가우디의 아픔에서 비롯되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유독 발이 저릿저릿했던 그는 걷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친구는 없었고 고독해졌다. 진단을 내리기 위해서 이런 얘기까지 알아야 하는가. 책은 마치 실제로 가우디를 진단하듯 가우디의 발부터 시작하여 온몸을 살펴본다. 각종 문헌을 뒤져 대여섯 가지의 병명을 하나씩 지워나간다. 저자의 유려한 말솜씨는 그 과정을 지루함이 아닌 번뜩이는 재치로 채운다.
역사 속의 인물들은 때때로 오해를 산다. 때때로 흥행을 위한 잘못된 각본의 주인공이 된다. 모차르트를 시기하지도, 그의 유작이 된 '레퀴엠'을 익명으로 의뢰하지도 않았던 살리에리처럼. 살리에리는 심지어 '아마데우스'를 통해 어린 천재를 시기한 질투의 화신으로 낙인찍히지 않았던가. 모차르트 또한 아주 어린 시절의 천재성과 가벼운 이미지 때문에 '매독'으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수군거린다. 그들도 그저 한 명의 사람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보다 객관적이고 진실한 진단을 받을 필요가 있다.
저자는 유명하다는 이유로 죽어서도 자신들의 가슴에 오해와 과장이라는 청진기를 대는 후대인들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직접 보다 정확한 청진기를 들고 온갖 문헌과 기록이라는 첨단 장비를 꺼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편협한 시선을 거두고 진심이라는, 의사의 첫 번째 소명으로 선조들을 살폈다. 그렇게 드러난 흥미로운 진실들. 세종은 당뇨였을까? 모차르트는 왜 갑작스레 숨을 거두었을까? 생각보다 많은 역사의 왜곡을 깨부수고 그들은 마침내 진실을 찾았다.
다시 한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얼마나 많은 과거가 각색되었을까. 한 의사의 진실이라는 날카로운 청진기로 말미암아 잘못된 과거가 진실을 찾을 수 있기를. 그리고 오늘날의 시대는 거짓보다는 진실만을 좇는 시대가 되기를.
진실이라는 청진기로 위인들을 진단하다, <세종의 허리 가우디의 뼈>였습니다.
* 본 리뷰는 부키의 도서 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