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프리 삭스 지리 기술 제도 - 7번의 세계화로 본 인류의 미래 ㅣ Philos 시리즈 7
제프리 삭스 지음, 이종인 옮김 / 21세기북스 / 2021년 8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돌아갈 수 없는 발전의 순간이 있었다. 진보된 과학, 기술, 사회, 체계를 경험한 인류는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발전이라 이름 붙인 것이 고작 음식을 익혀 먹거나, 불을 피우거나, 말을 길들이거나, 철광석을 녹이는 간단한 일일지라도 진보 이전의 시대를 살던 인류에게는 하나의 거대한 혁명이었다.
동아프리카의 어느 한 후텁지근한 기후에서 시작한 인류는 길게는 수만 년에 걸쳐 전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여전히 수렵채집 활동을 하며 살아가던 때의 일이다. 해수면이 낮아 대륙과 대륙이 이어져 있었다고 해도 수만 km에 달하는 거리를 수천 년 동안 서서히 이동한 우리의 조상들은 실로 놀라운 존재이다. 다시 인고의 시간이 흘렀고 중국의 어느 한 비옥한 강 하구, 꾸준히 범람하는 나일강 유역, 건조한 중동의 사막 지역 등 곳곳에서 지역별 특성을 지닌 인류 집단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선조들은 어떻게 정착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또다시 수천 년이 지나 어떻게 서로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
인류가 보다 발전된 존재가 되기까지 각각의 분기점마다 거대한 혁명이 거쳐갔다. 혁명은 전 세계 곳곳에 퍼져 있는 인류에게 거의 공통적으로 작용했던 사건이었고 서로의 존재를 일깨워주는 경고였으며 높은 곳으로 인도하는 지시등이었다. 더 광범위하게, 더 깊게, 더 복합적으로 인류의 삶을 뒤흔든 혁명, 우리는 그것을 '세계화'라 부른다.


'빈곤의 종말'의 그 제프리 삭스가 실로 오랜만에 세계 경제와 역사를 한눈에 통찰하는 수작을 들고 나왔다. 거의 7만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 기마 시대, 제국 시대를 거쳐 산업 혁명기, 그리고 마침내 디지털 혁명의 시대까지 인류의 문명을 깊숙이 탐구한다. 저자가 '세계화'라 이름 붙인 각각의 혁명이 인류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우연적으로, 또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었는지를 돌이켜보면 독자들은 인간 세상의 반복적인 원리를 깨닫게 된다. 쉽사리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군상'의 근원부터 시작되는 저자의 탐구 여행은 그렇기에 오늘날 벌어진 지구촌 곳곳의 참상을 더욱 잘 설명한다. 흥미로운 시선으로 몇 천 년의 역사를 여행하다 마주한 21세기는 숨이 막힌다. 그러나 그럼에도 저자는 과거에서 미래를 바라보며 미래를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해 몇 가지 제언을 고한다.
<제프리 삭스 지리 기술 제도>는 인류 역사에 존재했던 7번의 세계화를 지리, 과학기술, 제도라는 3가지의 필연적인 조건을 통해 분석하며 우리 사회를 해석하는 책이다. 농경을 시작하고, 역축(노동이나 운송 등에 쓰이는 동물)을 순치(길들임) 하고, 대륙 간 항해를 시작하고, 유기 노동(사람이나 동물의 힘을 빌린 노동)에서 벗어나는 등 7번의 세계화는 각각 인간 사회를 이전과 극명한 간극으로 움직였다. 그 과정에는 단순히 창의적인 인물 또는 집단이 새로이 발명한 기술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19세기 영국 이전에 중국 송이나 명 또한 1인당 생산을 놀라운 속도로 발전시킬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허나 마땅한 기술이 없었다. 반면 영국에는 산업 혁명 이전부터 석탄 소비가 급증하여 석탄 공급이 원활히 진행되고 있었고 바로 그때 증기기관이 성공적으로 상용화된 것이다. 동시에 뻗어가는 해상 무역과 개인의 재산권을 인정해주고 새로운 기술을 산업적으로 활발히 이용하려는 정부의 시스템도 한몫했다. 이처럼 인류가 탄생한 바로 그 순간부터 인류가 존재했던 모든 문명은 우연 또는 필연에 의해 과학, 기술, 제도라는 3가지 요소가 맞물리는 적절한 시기를 맞이했다. 바로 그때가 '세계화'의 순간인 것이다.
옛 아메리카 땅에는 '말'이 빠르게 멸종되었다. 유라시아 대륙은 하나의 거대한 판으로써 동방과 서방의 제국이 서로 경쟁하고 교류하며 함께 발전할 기회를 얻었지만 아메리카는 아니었다. 때문에 서방의 말을 탄 개척자들이 아메리카 땅을 밟을 때까지 아메리카의 인디언인 아메린디언들은 말의 수송력과 이동력을 활용할 수 없었다. 말을 통해 수천 km 거리의 미개척지를 탐험하고 무거운 광물을 옮길 수 있었던 '외부인'에게 아메린디언들은 짓밟힐 운명이었던 것이다. 단순히 지정학적 위치뿐만 아니라 지리에 따른 광물 자원 분포, 기후, 작물 현황 등을 의미하는 '지리'는 이처럼 세계화에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다.
석탄은 증기기관 이전에도 보일러에 들어가는 주요한 연료였다. 석탄으로 발생시킨 열을 큰 손실 없이 다양한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는 기술이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거쳐 완성되었기에 자원이라는 '지리' 요소는 영국에 산업혁명이라는 불씨를 지핀 것이리라. 더불어 산업혁명뿐만 아니라 7차례의 세계화에 공통적으로 관여한 정치, 사회, 문화와 같은 '제도'적 요소는 과학기술과 지리를 더욱 공고히 만드는 마침표였다. 각각의 시대마다 지리, 기술, 제도가 맞물려 떨어진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통해 독자들은 다음번 세계화는 어떠한 방향성을 지닐지까지도 나름의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인류 역사를 통해 세계 경제를 읽는 책의 대부격인 <총, 균, 쇠>에 버금간다고 말하고 싶다. 자료의 방대함은 <총, 균, 쇠>의 그것에 비해 조금 부족하지만 '혁명'이자 '세계화'라는 분기점을 통해 인류 사회의 대격변기를 잘 그려냈다. 감히 역작이라 할 수 있고 흠뻑 빠져들어 정신없이 읽었다 할 수 있다. 혹자는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라 말하지만 역사는 분명 반복되곤 한다. 인류 사회 전체를 바꾼 분기점은 수만 년에 걸쳐 일곱 차례가 존재했었다. 이는 분명 반복되는 진리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현대의 인류가 지나고 있는 일곱 번째 세계화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생존해야 할지는 과거 속 세계화에 분명 존재하리라.
인류 사회를 뒤흔든 혁명, 7번의 세계화. <제프리 삭스 지리 기술 제도>였습니다.
* 본 리뷰는 21세기북스의 도서 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