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리터의 피 - 피에 얽힌 의학, 신화, 역사 그리고 돈
로즈 조지 지음, 김정아 옮김 / 한빛비즈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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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라떼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2010년대 초반까지는 군부대로 헌혈 차량이 방문했다. 10분 정도면 완료할 수 있는 전혈 수혈의 주기에 맞추어 2달 정도에 한 번씩 기다란 헌혈 버스가 찾아왔고 초코파이, 약간의 휴식, 외부인과의 대화 등 매력적인 요소를 두루 갖춘 헌혈은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2년간 꾸준히 헌혈을 하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감정은 '행복'이었다. 400ml의 빨간 피가 혈액이 필요한 사람에게 생명의 시간을 연장시켜 줄 것이라는 생각은 받는 사람이 아닌 주는 사람에게 숭고함과 감사함, 그리고 행복을 느끼게 만드는 일련의 행위였다.

수술대에 오르는 사람에게 혈액은 가장 필요한 대상이다. 암 수술 등 대량의 출혈이 발생하는 수술에서는 100단위가 넘는 혈액이 사용되기도 한다. 피를 쏟고, 피를 붓는 전쟁 같은 시간이 지나가는 것이다. 아무리 아픈 부위를 잘 고쳤다고 해도 피가 제대로 순환되지 않으면 환자는 살아날 수 없다. 넘어지거나, 칼에 베이는 일이 아니라면 일상에서는 거의 볼 수조차 없는 피는 우리가 평소에 인식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소중한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늘 그렇듯, 피 또한 그 중요성에 걸맞지 않은 대우를 받고 있다. 혈액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늦게 시작된 편이다. 생명을 구하는 매개체이자 치명적인 병증의 전염 수단이기도 한 피를 일부 국가에서는 여전히 비과학적이고 비위생적인 방법으로 관리한다. '검은 피'라며 흑인의 피를 특정하여 부르는 차별적인 모습을 불과 20년 전까지 목격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피가 얼마나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미래에 어떤 모습으로 사회에 영향을 미칠지 거의 알지 못한다. 관심을 가지지도 않는다.

<5리터의 피>는 피에 얽힌 거의 모든 것을 다룬 경이로운 책이다. 피와 인체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 수혈, HIV를 중심으로 한 전염병, 피의 미래 등 인류 사회에 피가 지니는 막강한 영향력을 다양한 관점에서 탐구한다. 그 과정에서 독자들은 여전히 엉망진창으로 혈액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빈민국의 모습을 보며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분노한다. 양의 피를 사람의 혈관에 주입하고, 소의 피를 주입하고, 마침내 인간의 피를 주입하는 그 기괴하고도 흥미로운 과정 속에서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게 된다. 미국이나 영국, 우리나라와 같은 국가와 달리 인도에서는 피를 구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운 일이고 심지어는 피를 웃돈을 주고 구입하는 상황에 비참함을 느끼기도 한다. 생명공학의 중심이자 사회 운동의 거대한 논쟁 주제이며 동시에 하나의 '경제'를 형성하고 있는 혈액은 경험하지 못했던 거대한 이질감을 경험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무척이나 흥미로운 책이다. 놀라운 수준의 흡입력은 피에 관한 교양과학적 지식이 어쩌면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개인적인 도움을 주지 않을 수 있음에도 끝까지 읽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의학의 거의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 수많은 의료인이 기상천외한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장구하게 혈액학을 만드는 과정은 상당히 흥미롭다. 혈액의 수요와 공급에 따라 생명의 원천이 정치적으로 사용되는 과정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토록 많은 이야기가 피 하나에 얽혀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오랜 조사 과정을 통해 저자는 피의 역사학, 피의 사회학, 피의 경제학, 피의 의학에 관한 하나의 '역사'를 작품으로서 완성한 것이다.

인간의 신체 중 소중하지 않은 것은 물론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소중하다고 여겨지는 '심장'은 결국 피의 상징이다. 피가 동맥과 정맥, 그리고 모세혈관을 타고 이어가는 10만 km의 여정을 완성시켜주기에 심장을 상징적인 의미로서 '심장'이라 흔히 말하는 것이다. 산소와 호르몬, 각종 영양소를 공급하고 이산화탄소와 같은 독소를 수거하는 피는 인간에게 진정으로 생명력을 부여하는 존재이다. 피로서 인간은 살아가고 피로서 인간다움을 느낀다. 그러한 피에 대한 다층적인 고민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만든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인간은 피와 관련된 다양한 사회구조를 형성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혈액은 어딘가에서 부족하다. 혈액을 진중하게 다룬 경이로운 논픽션을 통해 이제는 피가 전 세계를 순환해야 한다. 거의 모든 세포에 산소를 공급하는 우리 몸의 혈관처럼 피를 둘러싼 인간의 온정도 어느 한 곳 지나침 없이 온전히 닿아야 하는 것이다.

혈액에 관한 경이로운 이야기, <5리터의 피>였습니다.

* 본 리뷰는 한빛비즈의 도서 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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