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않기 위해 쓴다 - 분노는 유쾌하게 글은 치밀하게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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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때론 날카로운 펜촉은 더 날카로운 칼날보다 압도적인 권위를 가진다. 대중들은 날로 똑똑해지고 많이 아는 '듯' 행동하는 현인처럼 굴지만 실상은 SNS나 폐쇄적인 커뮤니티에 게시되는 자극적인 정보를 가감 없이 섭취하고 과장하여 배설한다. 글을 포함한 여타의 컨텐츠를 만드는 것이 집에서 즉석밥을 돌리는 것보다 쉬워진 오늘날, 자칫 잘못된 정보로 호도된 사람이나 기업, 사건, 주체 등은 영원히 미디어 속에 갇힌다. 심지어는 사람을 인격적으로, 또는 간접적이지만 물리적으로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은 역사의 모든 면을 살펴볼 때 늘 '펜'이었다.

글은 매섭다. 누군가의 시선에 사로잡힌 글은 금세 온 세상을 퍼진다. 글의 본질적인 의도에 대해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의 가치판단을 하는 것을 잠시 젖혀두더라도 타인의 의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매서운 것이다. 때문에 많은 글이 부당한 권력을 위해 세상에 공표되었다. 부정한 정부가 부정한 언론과 손을 맞잡고 시민들의 생각을 통제했던 사례는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마찬가지로 많은 글들이 부정을 거부하고 죄악에 맞서기 위해 힘을 얻었다. 거악에 의해 부패한 시스템을 전복하거나, 오래도록 관습인 양 굳어진 인습과 악습을 부수어 새로운 평범성을 만든 것도 글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은 든다. 단순히 인터넷과 뉴스와 신문지면 상에 오르는 글만으로 세상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흐를 수 있을까.

여성이 억압받는 것이 더욱 당연했던 시기, 거친 환경에서 고된 노동을 행하는 이들을 보호하지 않는 것이 당연했던 시기, 재산에 의한 암묵적인 계급이 더욱 만연했던 시기에 머릿속에 떠올랐던 심각한 의문들을 스스로 파헤쳐 나갔던 저널리스트가 있다. 저널리즘이 시대를 바꿀 수 있는 진짜 등불이 되기 위한 대안들을 차분히 모색하고 실천했던 한 여성. 바버라 에런라이크이다.

<지지 않기 위해 쓴다>는 '노동의 배신', '희망의 배신' 등 부조리하고 모순적인 사회 시스템의 한복판에 직접 뛰어들어 느꼈던 참상을 고발했던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기고문을 차곡차곡 모은 책이다. 전작에서 다루었던 글을 처음 기고할 당시의 진실한 감정을 느낄 수 있고, 저자가 40년에 걸친 저널리스트 생활 동안 걸어왔던 길의 변화상을 함께 파악할 수 있다.

저자는 저임금 노동자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밝히기 위해 실제로 그 삶 속에 뛰어든다. 가장 저렴한 월세의 트레일러촌을 주거지로 선택하고 식당에서 접시를 닦거나 호텔에서 서빙을 했다. 그리고 중산층이나 상류층은 결코 알 수 없는 노동자 삶의 이면을 낱낱이 밝힌다. 독자들은 자신들이 몰랐던 사회적 병폐를 이면을 바라보고 동시에 글로서 세상을 바꾸기 위한 저자의 의지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전작의 주제와 관련된 기고문뿐만 아니라 비교적 최근의 글 또한 함께 실려 있다. 애니멀 테라피, 즉 동물과의 교감을 통해 영적인 안정을 느낄 수 있다는 이 새로운 트렌드는 어떤 시각에서는 무척이나 터무니없고 위험하다. 동물은 동물로서 자연의 품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반려동물 문화가 무척이나 발전을 했지만 여전히 인간 곁에 있는 동물들은 인간과의 생활에서 조화를 깨는 경우가 많다. 귀여운 고양이와 강아지도 가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상황에서 '테라피'라는 목적으로 동물을 악용하고 착취해도 될까. 이 또한 인간의 과욕은 아닐까 우려스러운 점이다.

미국에서 출발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 페미니즘 사상과 남성성에 대한 새로운 시선 등 젠더 문제 또한 빠지지 않는다. 여전히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는 영역이지만 저자는 과감하고 대담하게 여성으로서, 또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세상을 바꾸는 글쓰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글은 매섭다. 잘못된 세상을 바꿀 수 있기에 부당한 권력으로 낡은 시대를 쥐고 있는 자들에게 매서운 존재이다. 글만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스스로 글에 권위와 위엄을 쥐여 주었다. 그저 널찍한 고급 목재 테이블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상상의 날개를 펼쳐 글을 끄적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회의 한 이면이 되고 시스템의 피해자가 됨으로써. 덕분에 그녀는 당당하다. 적어도 그녀의 글은 진실성이라는 칼날을 품게 된 것이기에. 용감하게 진실성이라는 칼날을 품은 펜촉은 더없이 강력한 무기가 된다. 그녀를 부조리한 세상에서 지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펜이라는 칼날.

진실이라는 칼날을 품은 펜촉, <지지 않기 위해 쓴다>였습니다.

* 본 리뷰는 부키의 도서 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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