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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 1만 년 나이테에 켜켜이 새겨진 나무의 기쁨과 슬픔
발레리 트루에 지음, 조은영 옮김 / 부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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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열흘 중 아홉일은 화창한 날씨에 비 내리는 날은 거의 없는 애리조나의 투손(투싼). 밤하늘을 관측해야 하는 천문학자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자연조건을 지닌 이곳에서 수목의 생장을 통해 과거를 살피는 학문이 출발했다.
하버드 천문대에서 일하던 앤드루 앨리콧 더글라스를 애리조나의 투손 사막으로 부른 건 하버드 출신의 사업가 로웰이었다. 별 보는 일에 광적인 흥미를 지니고 있었던 로웰은 더글라스를 고용해 화성과 지구가 일직선이 되는 시기 등을 관측하라고 했고 그 과정에서 로웰의 지나치게 가볍고 경망스러운 과학에 대한 태도가 더글라스의 심기를 거스른다. 결국 더글라스는 일련의 사건을 계기로 애리조나 대학교의 물리학 및 지리학교수로 부임하게 된 더글라스는 벌목되어 있던 나무의 나이테 속에서 태양의 과거 활동을 추적하겠다는 흥미로운 가설을 세운다.
'연륜연대학(dendrochronology)', 식물 생장이 만든 굳건하고 고고한 증표인 나이테 속에서 과거의 연대기를 추적하는 학문인 이 생소한 학문은 그렇게 풀 한 포기 자라기 힘든 애리조나 주 사막에서 시작된 것이다.
<나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벨기에 출신의 '발레리 트루에'가 대학원 과정 중 우연히 추천을 받아 떠나게 된 탄자니아 탐험에서 경험한 나무의 정직한 속삭임과 함께 시작된다. 지름 0.5cm의 작은 천공기를 나무의 가장 중심부까지 닿게 하여 온통 선으로 가득한 나이테를 추출하는 과정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초보자들은 연신 땀을 훔쳐내며 하루에 10개를 추출하는 것도 벅찬 일. 메고 간 배낭에 나이테 조각들은 잔뜩 담아 숙소로 복귀한 후 나무의 태초부터 현재까지를 눈과 현미경을 통해 관찰하는 일은 모든 수고를 기쁘게 만드는 일이다. 그 나이테 속에 역사적인 가뭄과 태풍, 이산화탄소 농도가 급격히 변화하는 모든 순간이 담겨있다면 더욱더!
나이테는 되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보다 정교한 기록이다. 나이테보다 훨씬 오래전의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이지만 때로는 수 세기에 달하는 오차 값을 지니기도 한다. 나이테는 오로지 가장 바깥쪽의 층만 살아 움직이며 성장하기 때문에 안쪽의 이미 죽은 세포층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가뭄이 들어 많이 성장하지 못한 해도, 유난히 따뜻한 날씨에 과거 10년보다 더 많이 성장한 해도, 심지어 체르노빌에서 뿜어져 나온 방사선이 세포의 대부분을 쓸어간 해에도 정확한 역사를 담고 있다. 비록 수십만 년 전의 기록을 담고 있는 나무는 찾아볼 수 없지만 1만 2천 년이 넘는 절대적인 연대기를 확장시켜준 나무는 특히 고기후 연구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지역에 따라 강수량은 큰 편차를 보이기에 미국의 세쿼이아 나무에서 추출한 나이테와 독일의 참나무 나이테로 기후의 평균적인 특성을 파악하는 것은 좋은 접근이 아니다. 반면 기온의 경우 상당히 보편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날씨가 따뜻한 열대지방에서 자라는 수목의 경우 기후나 낮 길이의 차이가 거의 없는 환경에서 자랐기에 나이테에 뚜렷한 구분을 찾기 힘들다. 사계절이 뚜렷한 환경에서 자라는 나무를 통해 과거 수천 년의 기후를 살펴볼 수 있는 이유이다. 연대를 정확히 파악한 하나의 나이테와 비교를 통해 연륜연대 학자들은 다양한 나이테를 연결한 연대기를 만들 수 있다. 독일 인근의 나무에서 완성한 1만 2천 년에 달하는 거대한 참나무 연대기는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의 부족함을 채워 산업 혁명기 이전에도 탄소 배출이 증가하고 있었음 등을 밝혀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나이테만으로 이토록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점이 신기할 정도이다. 높이 120m에 달하는 세쿼이아 나무가 수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버틸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떤 기후 환경이 필요했을까. 식물의 생장에는 DNA도 큰 역할을 하지만 기후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 기후에는 '산불' 잘 발생하지 않을 수 있는 사려 깊고 온화한 특성도 물론 포함된다. 체르노빌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면 음산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침엽수 숲이 항상 등장한다. 시간당 원자폭탄 수십 개에 달하는 방사능 물질을 배출한 체르노빌 근처에 숲이 여전히 존재할 수 있을까? 실제로 당시 사고 때 많은 생명체가 죽임을 당했다. 일부 살아남은 나무는 몸속에 방사능 피폭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기괴하게 뒤틀린 흔적은 수백 km, 아닌 수천 km 밖의 나무에서도 발견되며 당시의 처참한 상황과 위험성을 있는 그대로 고증한다. 늘 푸른 존재로만 알고 있던 나무는 사실 그 무엇보다 정교한 세계사의 아카이브였던 것이다.
나무속에 은밀히 담긴 지구의 역사에 숨이 멎는 느낌을 받았다. 투박한 외피에 가려져 그토록 섬세한 존재임을 몰랐던 나무는 저자의 말처럼 조금의 거짓말도 없이 인류 출현 이전의 시간부터 존재하며 지구의 작은 숨결 하나하나를 모두 적어내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기록 속에는 낯 뜨거운 인간의 과오 또한 수없이 많이 담겨 있었다. 탄소 배출, 기온 상승, 기후 변화 등 나무라는 역사가가 빠뜨릴 수 없는 중대한 사건들이 나이테에 담긴 것을 보며 인류는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인류의 과욕은 자칫 위대한 나무들이 이어가고 있는 수만 년의 연대기를 마침내 끝낼 지구의 가장 큰 위기가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나이테, 무엇보다 정교한 세계사의 아카이브, <나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였습니다.
* 본 리뷰는 부키의 도서 지원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