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로 산다는 것 - 워킹푸어의 시대, 우리가 짓고 싶은 세계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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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공'에 '올인' 하는 사회의 문제점들은 뭘까요?
가장 널리 알려지고 많이 토론되는 문제는 '열공' 밑에 깔려 있는
단선적 신분 상승 열망입니다. 단순히 '재미있어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통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죽도록 '노오오력'하는 것이죠. 이렇게 낮고 높은 서열이 한국에서는 완벽하게단선적입니다.

​코로나 19로 학교들이 물을 닫아 전국의 아이들이 워킹맘들의 24시간 일감이 되었었죠. 그렇다고 해서 그 워킹맘들의 직장일은 누가 여주었나요?사실 양성 평등 정책 차원에서 당연히 워킹맘의 업무를 줄여주었어야 하지만 그렇게 해준 직장이 있었나요? 불문가지(不問可知) 일입니다.
국가와 자본에게 새로운 '병역 대상자와 노동자'들이 필요하다면 육아 노동을 둘러싼 '조건'부터 본질적으로 달라져야 합니다.

-> 너무나 공감이 되서 아팠던 이야기, 육아 노동에 둘러싼 조건이 본질적으로 달라져야하는 지금 이 시대에 살고 있어서

노르웨이에서는 누군가와 같이 산 다는 것이 '부담'이라면 한국에서는 '사치'입니다. 신자유주의의 폭풍노도 속에서 '가정'은 점차 침몰하고 있습니다. 수만 년의 인류역사에서 최초로 '혼자'가 기본인 새로운 세대가 탄생했습니다. 그렇게 개개인의 인간적 접촉면이 줄어드는 만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배려의 사회', '따뜻한 사회' 입니다.

서울대 총장이나 장관을 지낸 사람이 비싼 병원에서 비싼 치료 받다가 유명을 달리하게 되면 분명히 '전-', '-장'의 별세라고, 훨씬 더 자세하게 보도되죠. 무슨 무슨 '대'를 나오지 않은 노동자라면 백 번 태어났다 다시 죽어도 공론의 장에서 '별세' 할 수도 '서거'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저 '사망'만 하게 되어 있습니다. 언어란 '급'들의 사회현실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 현장 근로자들 사망했을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 애도 한다고 생각했는데 서거나 별세라는 언어가 '급'을 나눠서 살아 가고 있다는 건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해서 한번 더 반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저는 우선적으로 이름 없이 죽어가는 중생, 삶에서 평등을 누리지
못한 이들이 제발 죽어서라도 평등하게 애도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름 없이 살다가 이름 없이 죽어간 사람들을 중심으로
역사를 쓰고 싶습니다.

노르웨이 같은 경우에는 20년 동안 살면서도 단 한번도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뚱뚱하다' 소리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부부나 애인 또는 절친한 관계가 아니라면 이런말을 하는 것은 '체형에 의한 차별'로 여겨지고 절대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건 법률이 아닌 암묵지, 즉 사회적 통념입니다.

부하에게 반말투로 명령을 내리고는 부하가 당연히(?) 머리를 약간
숙이고, "네,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할 것을 예상하는 상사를 보면,
'이러면 절대 안된 다는 것이 언제쯤 통념이 될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언제까지 이게 당연한 일이 되야할까, 내가 상사가 된다면 달라질수 있을까

제가 원하는 세상은 영어가 오로지 본연의 기능, 예컨대 학자들의
국제 소통 등에만 쓰이고, 언어의 다양성의 존중받는 세상입니다.

제가 만난 20대들 중에는 국내에서 공무원이 되거나, 외국에서 정규직이 되는 삶을 꿈꾸는 이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국내 대기업 정규직은 '과로'와 '서열' 속에서 '복종'을 전제로 하는 만큼 덜 선호되는 것 같습니다.

-> 과로와 스트레스로 몸이 상하고, 서열과 복종속에서 살았던 마음이 상했던 지난 직장생활이 떠올라서 후배들이 안타깝고, 내 젊은 날이 안쓰러웠다.

우리나라 교육의 아주 큰 폐단은 세계사와 한국사를 따로 가르친 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대개 선택 과목인 세계사는 선택을 받은 경우도 많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인 고졸자나 대졸자는 '광무개혁'이나 '한일합병' 내지 '우리나라의 경제성장, 산업화, 민주화'를 어렴풋이는
알아도 세계사적 맥락에서의 의미는 전혀 모릅니다.
(중략)
결국 '대한민국 사람'은 학교 과정만 착실히 밟으면 오로지 대한민국의 통치자와 '지식인' 들이 서술해준 '대한민국만의 과거'를 아는
인간이 됩니다.

미국 시카고의 코로나19 사망자 가운데 70퍼센트가 흑인이라는 점에서 확인되듯, 이번 코로나19 사태는 기존의 종족적, 인종적 불평 등을 재확인시키고 더욱 키웠습니다. 미국에서 코로나19로 수입을 잃고 '식량의 위기', 즉 굶을 위험에 빠진쪽은 주로 20~30대 비백인 자영업자나 긱 경제(플랫폼 경제) 종사자였습니다. 평소 어려웠던 사람들이 이제는 아예 기아 직전으로 몰린 것입니다.

각국 내에 무서운 '사회적 격차'도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내부자,즉 중산층 이상의 구성원이나 공공 부문 및 대기업 종사자들은 그저 '불편함' 정도를 느끼는 반면, 외부자, 즉 중소기업 노동자나 불안 노동자 또는 자영업자 등은 그야말로 생존의 위기를 겪습니다.

-> 사회적 격차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진 않았지만, 주변인은 거의 모두 자영업자라 그 손실과 차별에서 느끼는 아픔은 남의 일 같지 않다.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현재의 기후 참사를 분석한 그는 아주 재미있는 지적을 남겼습니다. "기후 위기는, 사실 부유한 나라들의 자본가들에게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바다의 수면이 오른다 해도, 살인적인 폭염이 잦아진다 해도 그들과 그 가족이야 어짜피 거기에 노출될 리가 없습니다."
(중략)
한마디로, 기후 참극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주요 특징인 엄청난 지역적 불평 등을 심화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그러다가 지구 전체가 언젠가 인간이 살 수 없는 황무지가 되겠지만, 대자본의 계획은 이렇게 멀리 미치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지구가 황무지가 된다해도 그들 자신들만큼은 인위적인 환경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 하는 듯 합니다.

기후 참극은 미국 자본에 '문제'라기보다 차라리 '기회'로 보이고, 신냉전은 성장 동력으로 보입니다. 이는 어떤 '단절'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합법칙적인 '지속'에 가깝습니다. 단 우리 지구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과연 인간과 지구를 파괴하면서 작동되는 이런 시스템이 우리에게 맞는 것인지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봐야겠지만요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받아 리뷰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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