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후, 지구가 멸망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스피노자의 말처럼 사과 한 그루를 심겠습니까?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요? 허나 이 책을 보신다면 어느새 작중 화자에 공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한 달 후, 세계 과학자들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소행성이 날아온다. 이 위력은 1초마다 원자폭탄이 떨어지는 것이 120년 동안 계속되는 것이라 한다. 즉 인류 전체가 멸망한다는 것이다. 마치 인류 이전에 공룡이 살았고 멸망한 것처럼 이제는 인류 차례인 것이다. 이 책은 4개의 파트로 나누어지며 각 파트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하였다. 그리고 이 네 명의 주인공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첫 번째 파트인 샹그릴라. 주인공 에나 유키는 열일곱 살이다. 그리고 학급에선 하위 계층 즉 빵 셔틀 담당, 왕따이다. 상위 계층인 이노우에의 놀잇감인 셈이다. 좋아하는 후지모리 앞에서 망신을 당하고 속으로 '이따위 불공평한 세상, 멸망해라' 외치지만, 막상 그것이 현실이 되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진다.
끊임없는 학급 친구들의 창피와 모욕 속에서 유키는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 않으려 한다. 심각해지지 않으려 하지만, 세상이 정말 심각해진다. 인류가 멸망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인간은 어차피 죽게 돼있다. 근데 그것이 예정되어 있다면? 그리고 모두 죽게 된다면? 학급에서 상위 계층인 이노우에는 하위 계층으로 추락하고, 왕따였던 주인공 유키와 똑같아진다. 즉 인류 모두는 공평해진다.
재산을 모을 필요도, 회사를 다닐 필요도, 인간관계에 연연해할 필요도 없다. 즉 앞으로의 희망이 없다.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던 사람에게는 이것이 희망일 수 있고, 소위 상위계층에겐 매일매일이 눈물의 나날일 것이다. 곳곳에선 젊은이들의 폭동이 일어나고, 살인이 넘쳐나고, 시체가 즐비하고, 시체의 썩은 내가 진동한다. 허나 반대의 면도 있다. 계속 자신의 꿋꿋이 하는 사람도 존재할 것이고, 인간의 따뜻함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도 존재할 것이다.
두 번째 파트인 신지. 신지는 야쿠자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부모를 떠나올 수밖에 없었다. 허나 야쿠자 세계에서도 이용만 당한다. 그나마 의지하던 고타에게도 이용을 당하고 암울한 미래를 그리고 있을 때, 인류 멸망의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에겐 옛 연인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시즈카. 그의 끊임없는 폭력에 갑자기 예고도 없이 떠난 그녀를 찾으려 한다. 구청에 들어가 공무원의 멱살을 잡고 그녀의 주소를 알아내는 데 성공한다. 죽기 전에 그녀를 보고 싶다는 집념 하나로 그녀를 만나는데... 난 네 개의 파트 중에 두 번째 파트가 맘에 들었다. 신지의 내적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어느새 내가 신지가 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