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 이전의 샹그릴라
나기라 유 지음, 김선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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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후, 지구가 멸망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스피노자의 말처럼 사과 한 그루를 심겠습니까?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요? 허나 이 책을 보신다면 어느새 작중 화자에 공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한 달 후, 세계 과학자들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소행성이 날아온다. 이 위력은 1초마다 원자폭탄이 떨어지는 것이 120년 동안 계속되는 것이라 한다. 즉 인류 전체가 멸망한다는 것이다. 마치 인류 이전에 공룡이 살았고 멸망한 것처럼 이제는 인류 차례인 것이다. 이 책은 4개의 파트로 나누어지며 각 파트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하였다. 그리고 이 네 명의 주인공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첫 번째 파트인 샹그릴라. 주인공 에나 유키는 열일곱 살이다. 그리고 학급에선 하위 계층 즉 빵 셔틀 담당, 왕따이다. 상위 계층인 이노우에의 놀잇감인 셈이다. 좋아하는 후지모리 앞에서 망신을 당하고 속으로 '이따위 불공평한 세상, 멸망해라' 외치지만, 막상 그것이 현실이 되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진다.

끊임없는 학급 친구들의 창피와 모욕 속에서 유키는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 않으려 한다. 심각해지지 않으려 하지만, 세상이 정말 심각해진다. 인류가 멸망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인간은 어차피 죽게 돼있다. 근데 그것이 예정되어 있다면? 그리고 모두 죽게 된다면? 학급에서 상위 계층인 이노우에는 하위 계층으로 추락하고, 왕따였던 주인공 유키와 똑같아진다. 즉 인류 모두는 공평해진다.

재산을 모을 필요도, 회사를 다닐 필요도, 인간관계에 연연해할 필요도 없다. 즉 앞으로의 희망이 없다.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던 사람에게는 이것이 희망일 수 있고, 소위 상위계층에겐 매일매일이 눈물의 나날일 것이다. 곳곳에선 젊은이들의 폭동이 일어나고, 살인이 넘쳐나고, 시체가 즐비하고, 시체의 썩은 내가 진동한다. 허나 반대의 면도 있다. 계속 자신의 꿋꿋이 하는 사람도 존재할 것이고, 인간의 따뜻함을 잃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도 존재할 것이다.

두 번째 파트인 신지. 신지는 야쿠자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부모를 떠나올 수밖에 없었다. 허나 야쿠자 세계에서도 이용만 당한다. 그나마 의지하던 고타에게도 이용을 당하고 암울한 미래를 그리고 있을 때, 인류 멸망의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에겐 옛 연인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시즈카. 그의 끊임없는 폭력에 갑자기 예고도 없이 떠난 그녀를 찾으려 한다. 구청에 들어가 공무원의 멱살을 잡고 그녀의 주소를 알아내는 데 성공한다. 죽기 전에 그녀를 보고 싶다는 집념 하나로 그녀를 만나는데... 난 네 개의 파트 중에 두 번째 파트가 맘에 들었다. 신지의 내적 심리를 세밀하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어느새 내가 신지가 된 것 같았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베이기만 한 후자다. 하지만 전자와 나는 대체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멀쩡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것도, 기껏해야 바카라의 9나 슬롯머신의 7 같은 운의 차이다. 그런 불확실한 운에 휘둘려 그 후의 긴 인생에 영향을 받는다.

인간이란 존재는 애초에 허술하게 만들어진 것 아닐까?

인간이란 존재는 애초에 허술하게 만들어진 것 아닐까?

모든 것이 불확실함 속에서 굳이 의미를 추구할 필요가 있을까? 의미 추구가 오히려 인간을 구속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허무하지만 오히려 그런 허무함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당당하게 즐겨야 하는 것이 목적 아닐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인간에 대해, 그리고 내가 두 발을 지탱하고 있는 세상에 대해.

폭력이라는 카드에도 앞면과 뒷면이 있다. 악당을 쳐부수는 건 괜찮지만 노부부 살해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야 그렇겠지. 하지만 그것은 선악이 아니라 자기가 용서할 수 있는가 없는가.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없는가에 따른 판단일 뿐 공정함과는 거리가 멀다.

마지막 파트. Loco의 이야기. Loco는 최정상 아이돌 가수다. 아이돌로 성공하기 위해 자신의 과거를 숨기는 신비주의 전략을 택했다. 과거의 나를 버리면서 점차 성공하는 Loco는 어느새 사람들을 믿지 못하게 됐다. 득이 있으면 실이 있는 법. 그녀는 인류 멸망의 소식을 듣고 마지막 콘서트를 하기로 한다. 자신의 옛 밴드를 다시 결성하고자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마지막 콘서트를 하며 자신을 집어삼키려 하는 쏟아지는 듯 빠르게 다가오는 강렬한 빛을 바라본다.

나, 사실은 정말 무서워. 나미를 지켜야만 하는데 어째서 나는 이렇게 약할까? 어째서 아내나 아이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걸까? 하다못해 이유가 필요해. 우리가 죽어야 할 이유. 조금이라도 수긍하고 편해지고 싶어. 응? 내가 이상한 걸까?

나기라 유의 작품은 처음 접해봤는데, 전작 유랑의 달이 2020년 일본 서점 대상 수상작이라 한다. 그의 섬세한 묘사와 허를 찌르는 문장 등을 보노라면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내 맘속에 별 네 개 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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