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환한 어둠
황시운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6년 6월
평점 :
얼마나 아파봐야 이런 소설을 쓸 수 있는 걸까.
얼마나 아파봐야 그 아픔을 관찰보고서처럼 쓸 수 있는 것일까.
내 어머니는 20여 년 동안 무릎통증을 호소했다.
이후 10여 년 동안은 어깨통증을 호소했다.
그 통증을 공유해본 적이 없다.
내가 그런 통증을 겪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겪어보지 않은 자는 알 수 없다.
겪어보지 않았음에도 겪은 것처럼 상상하는 자들이 작가들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뛰어난 작가일지라도 한계가 있다.
그 뛰어난 작가들이 북한을 탈출한 분들을 취재하고 인터뷰하여 훌륭한 작품을 썼지만, 탈출한 분이 직접 쓴 글의 진정성을 이겨내지는 못했다.
통증도 그런 영역이 아닐까.
황시운의 환한 어둠은 통증에 대한 보고서 같다.
통증을 살아있는 동물처럼 그려내고 있다.
장애인인 형도, 그의 어머니도, 그의 동생도, 그의 아버지도 그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통증 가족이다. 통증의 연대다.
통증을 묘사한다고 해야할까, 관찰하여 기록해야 했다고 해야 할까, 무시무시한 통증에 공감 되는 듯했다.
잠시나마 내 어머니를 오랜 세월 상시적으로 괴롭혔던, 괴롭히는 통증에 공감했다.
식도암으로 돌아가신 내 아버지. 음식물이 암 부위를 지날 때의 통증 때문에 먹을 수가 없었던, 아니 먹을 때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던 아버지의 그 통증을 잠시나마 공감했다.
겪어보지 못한 통증이기에 금방 괜찮아졌지만.
사랑하는 가족이 통증에 괴로워할 때, 내가 대신 저 통증을 가져가 아프고 싶을 때가 있다.
내가 차라리 앓고 싶다.
환한 어둠은 그게 과연 가능한가 묻고 있는 것 같다.
불가능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누가 가족의 아픔 때문에 괴로워하겠는가. 내가 대신 앓고 말지.
실컷 울어서 좋을 때가 있다.
실컷 얻어맞았는데 기쁠 때가 있다.
이 소설은 덩달아 실컷 아파서, 좋다.
이 좋음은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아무튼 좋다.
이런 좋은 소설을 읽을 수 있어서 좋고,
이런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는 작가가 있어서 좋고,
하지만 작가님이 조금이라도 덜 아팠으면 좋겠다.
독자는 작가의 아픔을 나눠가질 수 있을까?
작가님, 조금이라도 덜 아프세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환한 어둠’도 좋지만
‘어두운 환함’이 더 좋은 것 같다.
내가 통증은 모르지만 환한 어둠, 혹은 어두운 환함은 어떤 것인지 알 것 같다.
시골 산골마을은 지금도 밤 10시가 지나면 칠흑같이 어두워진다.
그런데 마을에는 가로등 하나가 있기 마련이다.
달 밝은 날도 있고 별 많은 밤도 있다.
그 가로등 빛이, 달님이, 별빛들이 꼭 느낌을 준다. 환한 어둠, 혹은 어두운 환함.
황시운 작가님과 작가님이 토해놓은 소설은 그런 존재 같다.
시골마을의 가로등 같은, 시골 마을을 밝히는 달 같은, 달도 없는 밤의 별빛들 같은.
조금이라도 덜 아프면서, 그런 어둡지만 환한 소설 오래오래 써주셨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