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보드라운 뺨과 맑은 침을 가진 찬성이와 달리
할머니는 늙는 게 뭔지 알고 있었다.

늙는다는 건 육체가 점점 액체화되는 걸 뜻했다.
탄력을 잃고 물컹해진 몸 밖으로
땀과 고름, 침과 눈물,
피가 연신 새어나오는 걸 의미했다.

강의를 마치고 돌아올 때
종종 버스 창문에 얼비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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