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에게도 지민을 낳기 전의 삶이 있었을 것이다.
아이라는 족쇄에 아직 걸리지 않았던 때.
그리고 어쩌면, 엄마의 진짜 삶을 가졌던 때가.

만약 그때 엄마가 선택해야 했던 장소가
집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어떻게든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면.
표지 안쪽, 아니면 페이지의 가장 뒤쪽 작은 글씨,
그도 아니면
파일의 만든 사람 서명으로만 남는 작은 존재감으로라도.
자신을 고유하게 만드는 그 무언가를 남길 수 있었다면.

그러면 그녀는 그 깊은 바닥에서
다시 걸어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그녀를 규정할 장소와 이름이
집이라는 울타리 밖에 하나라도 있었다면.
그녀를 붙잡아줄
단 하나의 끈이라도 세상과 연결되어 있었더라면.
그래도 엄마는 분실되었을까.

지민 엄마라는 이름을 얻은 엄마.
원래의 이름을 잃어버린 엄마.

그러나 한때는,
누구보다도 선명하고 고유한 이름을 가지고,
이 세계에 존재했을 김은하 씨.

어떤 사람의 실패는
그가 속한 집단 전부의 실패가 되는데,
어떤 사람의 실패는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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