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동물을 소중히 다루는 게 보편화되어 ‘동물처럼 다룬다’는 말이 지금처럼 폭력을 상기시키는 대신 ‘배려하면서 친절하게 대한다’는 뜻으로 바뀌면 우리의 윤리 체계에도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학급 물품을 내 것처럼 아끼자!" 이 문구를 보고 나는 충격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이렇다. 그때까지 내가 외국에서 받은 교육에 의하면 그 문구는 응당 이렇게 쓰여 있어야 했다. "남의 것처럼 아끼자."
‘내 것’이라면 다소 소홀히 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남의 것’ 혹은 ‘우리 것’이라면 더 조심하고 아껴야 한다, 어린 나에겐 이것이 상식이었다.
[ 유제품 ]
성인이 되어도 여전히 젖을 먹는, 그것도 다른 동물의 젖을 빼앗아 먹는 동물은 인간이 유일하다. 우유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송아지다.
[ 달걀 ]
달걀 산업은 말 그대로 달걀의 대량생산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닭은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생체 기계일 뿐이다. 그러다 보니 수탉은 아무 쓸모가 없다. 그래서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수컷으로 감별 받은 병아리는 예외 없이 죽인다. 그것도 산 채로 그라인더에 갈아버리거나 질식사시킨다. 어린 병아리를 말이다.
우리의 탐욕과 수지타산 때문에 이 어린 생명을 그라인더에 수천만 마리씩 갈아서 죽이는 일은 상상도 못해봤을 것이다.
[ 식물은 생명 아닌가 ]
우리가 과학적으로 고통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신체의 통점과 중추신경계를 통해 전해진 자극이 뇌에서 종합되는 아프고 불쾌하고 피하고 싶은 감각이다. 같은 생명이라도 뇌와 중추신경계, 통점이 없는 식물이 이런 종류의 고통을 지각하고 분석해 처리한다고 생각할 해부학적 근거는 없다.
몰론 이것이 식물을 함부로 다뤄도 좋다는 논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식물도 당연히 아끼고 보존해야 한다. 동물을 함부로 다루는 사람은 식물에게도 그럴 확률이 높다.
[ 동물 복지 식품에 관하여 ]
가장 강조하고 싶은 점은, 동물에게 얼마나 대단한 복지를 챙겨줬든 간에 결국 최후는 똑같이 도살장행이라는 사실이다. 복지농장에서 자란 소도 공장식 축산 가축들이 향하는 도살장과 같은 곳에서 같은 방식으로 죽임을 당한다.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과연 우리에게 동물을 죽일 권리가 있을까?
자, 오늘은 야근하느라 수고했으니 삼겹살에 소주, 오늘은 우리 막내가 학예회 발표를 했으니 갈비, 오늘은 초복이니 삼계탕… 기념하고 싶은 뜻깊은 자리가 누군가의 고통과 희생 위에 차려지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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