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고서점 그라피티 - 교토 오사카 고베편
이케가야 이사오 지음, 박노인 옮김 / 신한미디어 / 1999년 10월
평점 :
절판


예전엔 한국에도 고서점가(街)가 존재했다. 중학시절(1979~1981) 언제쯤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형과 함께 청계천에 즐비하게 있었던 고서점들을 돌아다니며 참고서를 찾다가 그 중 한 곳에서 민중서림판 한영사전을 시중보다 싼 가격에 샀던 기억만은 생생하게 남아 있다. 당시 내게 고서점은 시중에서 정가 주고 사야 하는 책을 조금 싸게 살 수 있는, 규모는 작고 지저분한 곳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실제로도 가게 밖에 위태로울 정도로 높게 쌓여 있는 책들과 가게 주인밖에는 절대 찾을 수 없는 책들이 꽂혀 있던 미로 같은 매장 내의 분위기 또한 이 같은 생각을 강화한 요인일 것이다. 내 기억으로는 중 2이던 1980년에 교보문고가 문을 열었고, 그 전부터 종각에는 종로서적이, 내가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엔 종로 1가에 한국출판판매주식회사가, 그리고 종로 2가와 3가 사이에는 양우당서적이 있었다. 특히 중2 겨울방학 때 형과 함께 처음으로 교보문고에 갔던 기억이 나는데, 그 큰 매장하며 무엇보다도 어린 눈에 그 많은 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는 서가에 마음을 빼앗겨 그 뒤로는 혼자서 교보문고에 자주 가곤 했다. 이런 과정에서 청계천의 고서점가는 자연스럽게 잊혀져 갔고, 대학시절에는 청계천보다 오히려 서울역 앞에 포진해 있던 고서점들을 더 자주 갔었다. 이렇게 청계천의 고서점가는 내게 완전히 잊혀졌을까? 아니다, 이명박 정권 시절 정치권력과 경제 논리에 밀려 청계천이 재개발되면서 다시 나의 마음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재작년이던가, 청계천을 산책하다가 발길이 자연스럽게 고서점가로 향하게 되었고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으며 조금밖에 남지 않은 고서점들을 한 곳 씩 둘러보며 착잡한 심정에 사로 잡혔더랬다. 재개발로 거리는 깨끗해졌지만, 예전에는 비록 지저분하고 미로같았어도 한 곳 한 곳이 나름 개성적이었는데, 지금은 서점들이 모두 똑같은 이미지에 취급하는 책도 거의 비슷한 그저 그런 책 창고로 바뀌고 말았다. 비록 내가 정기적으로 청계천 고서점가를 순례하지는 못했어도 책과 얽힌 추억의 공간으로 마음속 한 쪽에 자리 잡고는 있었는데. 도시화가 가져온 쾌적함 대신에 몰개성의 극치를 달리는 단순 소비 공간으로 변해버린 청계천 고서점 어디에 책과 문화가 빚어내는 향기가 있단 말인가? 아쉽고도 마음이 아프다.

           나는 일본과 관련 있는 거의 모든 사항들에 대해 신뢰하지 않고 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지만, 책과 고서점에 관한 한 부러운 마음에 울컥 할 정도로 냉정하기가 무척 어렵다. 한국인 몇 명이 이 책을 읽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케가야 이사오가 직접 일러스트레이션을 그리고 써내려간 『일본고서점 그라피티-교토·오사카·고베편』을 읽고 나서 부러움은 더욱 커졌다. 모두 52곳의 개성적이고 특화된 고서점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특히 새가 위에서 보는듯한 시각으로 그린 각 서점의 조감도는 이 책의 백미라 할 정도로 정교해서 서점 내부와 서가의 위치, 특정 책들이 어디쯤 위치하고 있는지 등에 대한 정보량이 가히 고서점 가이드북으로써 최고가 아닐까 싶다. 책의 물질적 특성을 애호하고 생활 속에서 책읽기를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이 일러스트레이션만으로도 그 곳에 있는 책들을 모두 소유하고 있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힐 것이다. 아쉬운 점은 일러스트레이션 여백에 씌어져 있는 책에 관한 설명들은 번역이 안 되어 있다는 것. 아마 손 글씨체를 살려두느라 그랬을 텐데, 한자교육을 받지 못한 젊은 세대가 읽기에는 무리일 것이다. 아무튼 일러스트레이션 외에도 저자가 제시하는 서적애호정도 점검 항목이나 독서론, 서적수집벽, 고서 시장 등에 대한 단상들을 읽고 나니, 한국인이 일본인을 쉽게 극복하고 그들과 대등해지기가 아직도 요원하다는 생각이 들어 우울해졌다. 지금 한국인의 독서력은 일본인에 비해 어느 정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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