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 샬리마르
살만 루슈디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살만 루슈디 소설은 두 번째다. 두 소설 모두 인도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여러 군상의 욕망과 흥망성쇠를 다뤘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하지만 '한밤의 아이들'이 삶과 역사의 '부조리' 그리고 '아이러니'에 보다 비중을 둔 블랙 코미디라면, '광대 샬리마르'는 한층 더 짙고 어두운, 느와르의 냄새를 풍긴다. 인간(혹은 역사)이 가진 가장 밑바닥의 얼굴, 그 처연한 얼굴을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기어코 잡아낸 느낌이랄까.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 그리고 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어떤 끌림을 따라 최선을 다해 움직인다. 하지만 그 모습이 마치 공중에서 외줄을 타는 곡예사처럼 하나같이 위태로워 보인다.


2. 내가 가장 흥미로웠던 지점은, 주요 등장인물들이 어떤 특정 지역이나 국가 혹은 어떤 세력을 상징하는 것처럼 읽혔다는 것이다. ('한밤의 아이들'의 주인공 살림 시나이의 인생이 개인의 역사이자 곧 인도의 역사였듯이.)


3. 막스는 미국의 화신과도 같은 인물이다. 강대국의 권력 대리인이자, 성욕을 주체 못하는 망나니 혹은 카사노바. 인도의 미국대사로서 카슈미르를 찾은 막스는 부니를 보자마자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을 느낀다. 그리고 은밀하고 능숙하게 그녀와의 동침에 성공한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그가 젊은 시절, 나치라는 이름의 폭력에 맞서 싸웠던 레지스탕스였다는 것이다. 게다가 고향은 스트라스부르. 소설의 주무대인, 인도와 파키스탄의 영토분쟁이 끊이지 않는 카슈미르와 닮은 점이 많은 도시다. 독일과 프랑스의 접경 지역, 두 나라의 핑퐁 게임에 따라 소속이 달라지는 도시의 시민. (심지어 그는 유대인이다.) 그런 그를, 막스라는 사람을, 무엇이 어떻게 타락시켰는지 초점을 맞춰 읽어보는 것도 이 소설의 재미라면 재미일 수 있겠다.


4. 소설 제목에도 등장하는 샬리마르. 그는 복수의 화신이다. 자신을 떠난 아내 부니, 그리고 부니를 유혹한 막스, 이 두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 삶의 전부가 되어버린 남자. 어찌 보면 참 가여운 인물이다. 그는 이슬람 무장세력에 가입해 자신의 삶 전부를 복수라는 이름의 용광로 속에 내던진다. 물론 샬리마르라는 인물은 지극히 개인적인 동인에 의해 소설 속에서 움직인다. (그는 무장단체 내에서도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척 연기할 뿐이다.) 하지만 그가 품고 있는 그 강렬한 증오와 복수심은 서구 열강을 향한 이슬람 무장단체들의 정서와 꽤 맞닿아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5. 첫 번째 챕터의 주인공은 이름부터 인디아다. 그녀는 어딘가 나른하면서, 도덕과 규범으로 짜인 세상에 생채기를 내고 싶어 안달 난, 다소 뒤틀린 영혼을 가진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막스의 죽음을 목도하고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의 정체성은 근본적으로 뒤흔들린다. 그리고 마지막 챕터에서 그녀의 본명이 밝혀진다. (그런데 그 이름이 또 참 노골적이게도 카슈미르다.) 그녀는 결국 인디아가 아니라 카슈미르로서 거듭난다. 주체적으로 일어선다. 그녀에게 다큐멘터리 작가라는 직업을 부여한 것에도 어떤 의미와 상징처럼 느껴진다. 카슈미르는 종교나 이데올로기가 아닌, 현실 그 자체에 집착하는 인물로서 삶의 형태를 재조립한다. 막스의 나약한 딸이 아니라 샬리마르와 직접 맞서는 전사로서 다시 태어난다.


6. 반테러리즘을 외치며 다른 한편으로는 테러리스트를 지원하는 권력. 그 권력을 향해 칼을 쥐고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몸부림들. 선과 악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신분이 뒤섞이는 순간, 우리 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결국 한 폭의 지옥도일 뿐이다.


7. 개인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고, 선과 악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테러리즘에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하는 소설이기도 하고, 그 테러리즘의 근원에 무엇이 있는지 날카롭게 해부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살만 루슈디는 그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를, 600페이지가 넘는 하나의 묵직한 알레고리로 엮어내었다. 과연 대가다운 천의무봉의 솜씨로. 그래서일까. 굉장히 선명한 상징들이 곳곳에 눈에 띄면서도 결코 유치하게 읽히지 않는다.


8. '한밤의 아이들'이 동굴 속에서 발견한 고대 벽화 같다면, '광대 샬리마르'는 솜씨 좋은 공예가가 세밀하게 하지만 웅장하게 깎아낸 고대 조각상 같다. 이번 소설 역시 연신 감탄하며 읽었다. 지금 현존하는 작가 중에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의 소설을 살만 루슈디보다 더 잘 쓰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당분간 나의 페이보릿 소설가 TOP3 리스트 안에는 늘 그의 이름이 있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