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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회가 끝난 뒤 ㅣ 펭귄클래식 82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은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벌목>
'당신은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까?'
p. 37.
내용 속 인물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카프카스는 신비롭고 기묘하며 동시에 때묻지 않은 생명으로 가득한 곳,
또는 잔인하고 무지한 전사들이 점령하며 산다고 전해지는, 환상과 동경으로 버무러진 전설이 깃든 곳이다.
그러나<벌목>속의 지금 이곳은 몸의 온 감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긴장감으로 자욱한 전쟁터일 뿐이다.
그는 다시 끙끙거리며 영혼을 잡아 찢는 듯한,
세상에서 가장 처절하고 애처로운 소리로 신음을 토하기 시작했다.
마치 속세의 일을 깨끗이 정리한 사람이 더는 고통을 참으며 견딜 이유를 찾지 못하고
이제는 이 땅에서 떠나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p. 48.
드넓은 러시아 땅위에 자라는 자작나무는 러시아를 떠올리게 하는 중요한 매개체이자 러시아인들을 상징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안토노프가 부른 <조그만 자작나무>는 벨렌축을 위한 진혼곡이었는지도 모른다.
전우들은 정직하고 여린 마음씨를 가진, 사람 좋은 얼굴을 한 한 그루의 자작나무를 마음에 심었을 것이다.
톨스토이는 <벌목>에서 비인간적인 전쟁 속에서 너무나 인간적인 인물들의 소소한 일상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전쟁이라는 소재를 다루는 대부분의 책, 영화 등이 보여주듯이 이 단편도 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그 속에서 누가 피해자이고 가해자인가, 또 그것을 뚜렷이 구분지어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연약하고 작은 목소리이지만 언제나 우리의 가슴을 울리게 하는 외침이자 비명이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안개가 부슬부슬 처량하게 떠다녔고, 대기에서도 축축한 기운과 연기 냄새가 묻어났다.
주위엔 온통 마지막 불꽃을 사르는 모닥불의 밝은 불빛 반점들로 가득했다.
사방에 죽은 듯 정적이 감돌았고, 그 정적을 타고 안토노프의 구슬픈 노래가 고요히 울려 퍼졌다.
p. 77.
<폴리쿠시카>
폴리케이(폴리쿠시카)는 주위 농노들로부터 불신과 멸시를 받아온 사람이었다.
나쁜 평판으로 마을에서 미운털이 박힌 존재였기에
각 마을 별로 할당된 강제징집 대상 차출에서 1 순위에 있었다.
그러나 영주부인의 결정으로 그는 면제를 받고 심부름을 맡는다.
신병이 되면 20년 이상을 복무해야 하고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드물었기에
마을에서 결정해야 하는 선택은 너무도 괴로운 것이었.
이 차출을 두고 마을 사람들은 모여, 모두 자신의 아들들이 징집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서로를 물고 뜯다가 끝내 한 사람으로 몰아간다.
의도하지 않는 상황에서 서로에게 잔인해질 수 밖에 없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돈이 뭔지……돈이란 한낱 먼지 티끌과 같은 것을."
"돈이 있다면야 누군들 인색하게 굴겠소?"
"아, 돈, 돈! 모름지기 죄란 돈으로부터 비롯되는 법"
"이 세상에 돈만큼 많은 죄를 짓게 하는 것도 없지.(…)"
pp. 132-133.
그러다 우연인지, 의도에서 비롯된 것인지, 폴리케이는 큰 액수를 수금하는 책임을 지고
돌아오는 길에 잃어버린다. 자신을 믿어준 영주부인에게 오해를 살까 두려워 며칠동안 돈의 행방을
물으며 찾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죄를 지은 사람처럼 초초해 하며 불안해 하다가 목을 매달았다.
이어 그의 처참한 죽음은 막내 아이의 죽음으로 이어지고 폴리케이의 아내는 거듭된 불행으로 인한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한 사람과 그 가족이 어쩜 이처럼 가혹하고 잔인한 수렁 속으로 빠질 수 있을까.
어찌 되었든 목을 맨 사람은 여전히 다락방에 매달려 있었고,
그것은 마치 악령이 어느때보다 이들 가까이 와 있다는 사실과 무서운 힘을 과시하며
이날 밤 하인들 숙소를 거대한 날개로 덮고 있는 것만 같았다.
p. 152.
(…)생명의 기운도 없이 한 쪽 옆으로 기운, 비쩍 마르고 낯익은 몸뚱이와 가슴 아래까지 축 늘어진 머리,
눈은 뜨고 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선량한 얼굴로 죄라도 지은 듯 순한 웃음을 지은 폴리케이를,
완전한 평온을, 그리고 이 모든 것들 위에 내려앉은 정적을 …….
p. 153.
자신의 징집 면제를 보장 받은 것처럼 생각되었던 그 수금 책임이 결국엔 폴리케이의 삶을 뽑아 버렸고,
폴리케이가 잃어버린 그 돈을 우연히 발견한 사람이 있었다.
신병을 차출할 때 모든 마을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몰아갔던 두틀로프 집안이었다.
두툼한 돈 뭉치를 품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행복감과 두려움에 젖어 있던 두틀로프 노인은
폴리케이의 불행한 죽음을 불러왔던 그 돈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의 조카를 지켜주지 못하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지원병을 사서 조카가 강제 징집되는 것을 막는다.
가여운 농노들의 생활이 사실적으로, 쓸쓸하게 담겨있는 단편이다.
<무도회가 끝난 뒤>
지금 여러분은, 인간은 자기 스스로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분별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군요.
모든 게 환경에 달려 있고 환경이 인간을 해칠 수 있다고 말이지요.
하지만 저는 우연이 모든 걸 좌우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연한 사건이 제 인생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조금 들려드릴까요.
p. 187.
어떤 모임에서 토론거리가 나오고, 그 가운데 이반 바실리예비치라는 한 인물,
여러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하는 단편이다.
이반이 젊었던 시절, 그는 어느 무도회에서 만난 아가씨와 사랑에 빠지고, 그녀를 향한 마음만큼이나
그녀의 가족, 특히 그녀의 아버지 대령에 대해서도 맹목적으로 밝은 부분만 바라보게 된다.
가슴속엔 선한 마음으로 가득했고 더 이상 내가 아닌 것 같았어요.
나는 죄악 따위는 알지도 못하고 오직 선한 일만 행할 줄 아는, 이 세상엔 없는 그런 존재가 되었지요.
p. 193.
딸에게나 자신에게나 자상하고 다정다감한 대령의 성품과 바렌카가 가진 아름다움,
이반은 무한한 축복과 행복감으로 가슴이 벅차 올라 심지어 잠까지 설치는 상태에 이르렀다.
너무나 행복해서 주변 사람이 '측은하게' 느껴질 정도로(작가가 지닌 날이 선 듯한 통찰력과 탁월한 표현력에 경탄을!).
그러니 제대로 잠자리에 들 수나 있었겠는가. 결국 그는 동이 틀 무렵 축축한 대기 속에 잠긴 거리로 나갔다.
'사랑으로 온 세상을 껴안았다'는 그의 말처럼 길 위에서 자신이 본 모든 대상에 무한한 애정을 품는 이반은 어느새
바렌카의 집 근처에 다다랐고,
그곳에서 평생토록 잊지 못할 광경을 목격하였다.
자신이 하루 저녁 동안 품었던, 부풀어 터질 듯한 그 행복감을 산산히 부술 정도의 파괴력을 가진 그 무엇을,
'우연히' 마주치게 된 그것을 말이다.
자신의 두 눈으로 목격했음에도 이반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연유때문에 그 일이 벌어졌다고,
자신의 선입견으로, 혹은 착각으로 빚은 것일지라도
대령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쉬이 깨고 싶지 않았기에 자기기만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 대령에 대해 가진 마음이 얼마나 맹목적이고 어리석었는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또는 진실이라고 생각했던 환상과 눈앞에서 벌어진,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을 현실 사이의 연결고리를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소심한 자신을 대면할 용기가 없었는지도.
밝은 조명과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아름답고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
화려하고 우아한 춤사위, 사람들 얼굴에서 번지는 유쾌한 미소와 웃음소리,
무도회는 환상적이고 이상적인 가면을 쓰고 있어 현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는 곳이었다.
제목, '무도회가 끝난 뒤'의 상황은 잔인함이 토해낸 충격과 비참하게도 이를 본 자의 자기기만이라는, 뒤틀린 현실로 이어졌다.
젊은 아가씨의 싱그러운 아름다움과 그녀의 아버지가 가한 잔혹한 폭력 사이에서 젊은 이반은 길을 잃어 버렸다고 고백한다.
그의 마음은 5월에 활짝 피어 향내를 그윽하게 풍기다가
하룻밤 사이에 난데없이 내린 서리에 피폐해진 장미의 모습과도 같았다.
자, 이제 살다 보면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우연히 일어나고, 또 그로 인해 한 인생이 송두리째 변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아셨겠지요. 그런데도 당신들은 말하기를…….
pp. 202-203.
<위조 쿠폰>
어린 학생 둘이서 만든 위조 쿠폰 단 한 장이 어떠한 연유로 만들어졌고 이것이 어떠한 사건들을 불러일으키고,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를 보여주는 굉장한! 단편이다.
수많은 인물들과 사건들이 각각 전개되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그 사건들이 서로 맞물리는 구성으로 되어
이 단편소설이 나에게는 단편 속의 단편처럼 다가와 내가 받은 충격도 감동도 훨씬 컸다.
철없는 어린 소년들이 만든 작은 위법 행위가 큰 오해를 불러들이고 그것이 다시 얼마나 큰 증오과 불행을 만들어내던지!
하나 하나 넘어지는 도미노처럼, 무고하고 순수했던 사람들이 무너져 가는 모습을 읽는 내내 가슴이 아팠고
그들의 잔혹한 불행에 소름이 돋았다.
그동안 빚어진 악의와 증오, 원한이 어떻게 따뜻한 위로를 얻고, 치유되어 가는지 그 결과 어떤 모습으로 변해 가는지,
톨스토이가 풀어 놓는 그 과정은 정말 아름다웠다.
실로 인간에 대한 한 없는 믿음과 깊은 애정에서 나온 행위들이었다.
증오와 사랑은 마치 바이러스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퍼져 그들의 얼굴과 행동으로 나타났다.
마치 카오스와 같은 상황을 만들어 낸 원인은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위조 쿠폰이었다.
쿠폰은 수표와 같은 것으로, 돈을 대표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폴리쿠시카>에서도 나온 것처럼 이 단편에서도 '모든 죄는 돈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보는 작가의 견지가 이어진다.
사람의 정신과 생활을 쉽게 짓밟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피폐하게 만드는 그 악의 근원으로부터 시작하여
사랑 안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용서를 구하고, 영혼의 구원을 받으며,
짓이겨지고 곪아 있던 상처가 서서히 아물어 가는 과정으로 독자를 안내하는 작가의 필력은 감탄을 자아낸다.
자신을 가엾게 여겨요! 이건 다른 사람들을 해치는 게 아니라,
당신 자신의 영혼을 해치는 거……
p. 282.
(…)사람들은 모두 형제다, 그래서 서로서로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야 한다,
그래야 모두가 행복해진다.
p. 299.
리자의 순수한 영혼이 그의 영혼을 환히 비추자
그는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진정 가고자 했던 길에서, 진정 가슴을 뛰게 했던 일에서
얼마나 동떨어진 모습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p. 325.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가져라'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가장 많이 듣는 조언이 아닐까 한다.
듣는 빈도수만큼 행해지는 경우도 빈번하면 좋을텐데, 참 지키기 어려운 계명이다.
그러기에 모두가 힘써야 하는 마음가짐이고, 인류가 존재하는 한 없어지지 않을 계명이기도 하다.
물질이나 권력 모두로부터 철저히 소외당하는 자들에게 깊은 애정을 품고 그들의 삶에 희망을 심어 주기 위해 글을 썼던 작가,진정으로 실천하는 지성인이었던
톨스토이가 쓴 이 네 단편들을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고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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