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icture of Dorian Gray (Paperback) - Oxford World's Classics Oxford World's Classics 97
오스카 와일드 외 지음 / Oxford Univ Pr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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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영원성을 부여하는 대상을 가지고 있다.

젊음, 명예, 아름다움, 부, 사랑, 행복 등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만큼이나 다양하다.

개개인이 부여한 영원성은 빈도와 정도에 따라 탐닉에서 집착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젊음이 세월에 따라 부식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세월의 댓가를 자신의 초상화에게 넘겨버렸다.

우리는 많은 예술, 아니 모든 예술은 나이들지 않는다는 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데 큰 이견을 달지 않는다.

오랜 시간이 남기는 외부손상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예술의 노화현상이라고 생각치 않는다는 말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림의 물감층 아래, 조각의 돌 표면에, 건축물의 내부에 정신이 깃들었다고 여기는 것이 통상적이기 때문이다. 

작품에 담긴 숨은 언제나 고른 법이라고.

인간은 인간이고 예술은 예술일 뿐. 몸과 정신의 시간흐름이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므로.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변하는 인간세상에서 자신이 세운 가치에 영원히 가두어 지키고 싶은, 이러한 정신작용도 욕망의 큰 테두리 안에 노닐고 있을 뿐이다. 

도리언의 초상화를 그린 바질도 자신이 발견한 소중한 아름다움을 영원히 남겨 놓고 그 누구에게도 공개하는 것을 꺼렸다.

 예술가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사랑을 느끼는 감정과 유사하다.

자신의 감정과 감정을 품는 대상이 공유되는 것을 원하는 예술가는 없다.

 바질은 자신의 그림이 대중에게 보여지는 것 조차도 원치 않을 정도로 도리언의 젊은 아름다움을 독식하고 싶어했다.

이러한 폐쇄적인 성향이 그를 좀먹어 들어가 자멸에 이르게 했을지도 모른다.

 도리언의 존재에 그토록 집착했으니. 



여러 단편에서 슬픔이 묻어날 정도로 아름답고 유니크한 등장인물들을 창조해냈던 오스카와일드가 쓴 장편<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그가 평생을 두고 주장했던 심미주의 혹은 탐미주의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다. 

와일드는 변하지 않을 것만같은 그림 속 또 다른 자아로부터 젊고도 아름다운 상태를 조금씩 빼앗는 도리언을 그려냈다.

예술이 지닌 영속적인 특징을 박탈하려고 시도했다가 칼 끝 위로 몸을 던지고 말았지만 그의 용기는 신선하다. 

그리고 그런 도리언을 자신의 뮤즈로 삼았던, 그의 아름다움에 눈 먼 화가, 바질. 

아름다움이 곧 예술이라는 모토가 조금은 낡은 생각이라고 생각되는 이 시대에도 그의 작품은 생의 불꽃을 계속 피우고 있다. 

 

치명적인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삶을 내 던졌던 또 하나의 인물이 있다.

토마스 만이 쓴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 등장하는 중년의 작가 구스타프 아센바흐이다.

젊은 시절부터 감정을 억제하고 차갑게 식혀온 것에 익숙한 이 신사는 베네치아에서 머물던 중 우연히 타치오라는 소년을 만나고,

 자신의 삶을 지배해 왔다고 믿었던 모든 규율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미와 예술의 정수를 타치오의 숨막히는 아름다움 속에서 발견했다고  믿는다. 

베네치아에 전염병이 퍼져, 한시라도 빨리 떠나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지만

아센바흐는 타치오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그가 있는 베네치아를 떠날 수 없었다.

바닷가에 서 있는 타치오를 바라보다 서서히 죽어가는 주인공.

'아름다움이란 사랑스러운 동시에 눈에 보일 수 있는 것, …아름다움만이 우리가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고

감각적으로 견딜 수 있는 정신적인 것의 유일한 형식'

그리스 예술의 신봉자였던 빙켈만의 미학이론을 존중했던 토마스 만의 시각이  작품 곳곳에 짙게  배어있다.  

 
도리언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보존하기를 원했던 화가, 바질

 타치오의 존재를 쉴새없이 좇았던 아센바흐,

이 두 사람은 한 대상이 지닌 아름다움을 독식하려던 태도 때문에 스스로를 죽음에 내던졌던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그 미의 가치를 옛 그리스의 미와 결부시키고 있다.

절대미를 표현하고자 할 때 왜 항상 그리스미술이 언급되는 것일까?

현존하는 고대그리스 미술품을 두고 과연 아름다움의 상대성이 성립될 수 있을까?

추의 미학이 예술에 적용되는 시대에 사는 우리들이지만 우아하고 고결한 그 시절의 예술이 보여주는 이상적인 미를 보며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까?

도리언과 타치오의 외모에서 그 시대의 조각들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시선과 인식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아름다움과 소유욕망의 관계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책이 한 권 더 있다.  

프랑스 미술사학자 다니엘 아라스Daniel Arasse는 그의 유명한 저서, On n'y voit rien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모든 예술은 표상인 동시에 상징적이다.

표상의 속을 들여다보려는 사람은 위험을 감수해햐 한다.

상징을 읽은 사람은 위험을 감수한 사람이다.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中

…그는 그 이미지를 만질 수도, 키스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이미지를 잃고, 이미지는 사라집니다.

나르키소스는 회화의 발명자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원하는 어떤 이미지를 나타나게 하지만

그는 그것을 만질 수도 없고, 만져서도 안 됩니다.

그는 끊임없이 그것, 즉 이 이미지를 껴안으려는 욕망과

그 이미지를 보기 위해서 거리를 두어야 하는

필연성 사이에 매여 있습니다.

이는 Alberti가 <회화론>에서 피력한 견해를 Arasse가 풀어 쓴 것인데,

우리가 느끼는 아름다움은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우리와 아름다움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관조 뿐이라는 것을.

그 아름다움을 향유하며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은 바라보는 수 밖에 없다.

 만지는 순간 파멸의 길로 자신을 내던지는 꼴이 되고 만다는 것을, 나르키소스의 교훈은 나직히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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