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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우물 2 ㅣ 펭귄클래식 23
래드클리프 홀 지음, 임옥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무엇이 남았는가?
고독 혹은 그보다 훨씬 최악의 것이 남아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영혼을 수치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영원히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하는 삶이자, 말을 조심하고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직접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생략이라는 거짓을 말해야 하는 삶이며
사리 분별에 따라 언제나 침묵을 유지함으로써 세상의 불의와
공모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pp. 68-69
스티븐이 매몰차게 메리를 내쳤을 때
등불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제이미의 손길이 너무 침착해 보였다는 스티븐의 느낌이 떠올랐다.
모든 감정에서 초연한 듯 너무나 냉정한 스티븐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제이미와 바바라의 죽음 사건이 스티븐과 메리의 결말을 암시했던것 같다.
메리를 떠나 보내더라도, 스티븐만은 자신의 존재방식에 홀로 맞서기를, 나는 내심 고대했었다.
제이미와 똑같은 결심을 한 스티븐도 결국에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나약한 인간이었다니,
한편으론 화가 나기도 했다.
"날 찾아오고 싶을 때면 언제든 찾아오세요.
내 도움이나 조언이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난 언제나 여기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 점만은 기억해 둬요.
세계가 생각만큼 그렇게 칠흙 같은 어둠은 아니라는 걸 말이에요."
p. 349.
스티븐은 발레리의 충고를 들었어야 했다.
그랬다면 발레리나 마틴의 예상처럼 스티븐은 '그들'의 존재방식을 구축하는데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스티븐은
사회가 나서서 파 놓지는 못했던,
자신이 직접 판 그 고독의 우물 밖으로 나오지 못한채
스스로 침잠해 버렸다.
세상은 강력한 자기만족과 더불어, 독선적인 행동 지침을 만들었고,
스스로를 정상으로 간주하는 자들은 으스대고 뻐기면서
제멋대로 규칙을 깨고 그녀와 같은 자들을 짓밟고자 했다.
(…)그들은 때때로 지독한 짓을 저질렀다.
탐욕스러운 짐승들처럼.
아무리 추악한 죄를 저질러도 그들은 정상이었다!
p.87
난 신이 이마에 표시를 한 그런 사람의 하나다.
카인처럼 오점과 표시를 가진 존재다.
네가 내게 온다면, 세상은 널 혐오할 거다.
넌 박해받을 것이고, 널 불결하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죽음을 넘어서까지 진심으로 사랑하더라도
세상은 우리를 불결하다고 할 것이다.
p.165.
그녀의 우물 안에는 기쁨의 순간들이 흐르고 있다.
어린시절 아버지와의 우정과 깊은 교감이 반짝이고 있고,
먼 발치에서 바라보던 어머니의 아름다움이 일렁이고,
시린 첫사랑의 순간들,
광기와 같이 사랑을 쏟아 부었던 시절이 녹아 있으며,
고난을 함께 이기며 키워나간 애절한 연인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그리움이
끊임없이 솟아오르고 있다.
동시에 그 물은, 처음으로 느낀 사랑과 맹목적인 사랑이 남긴 좌절과 고통을 지나
혈육으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를 흐르면서 깊고도 검은 골짜기를 만들었다.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겪는 소외와 고립 속에서
함께 무기력하게 흐르다가 그녀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그 흐름을 멈추었다.
깊은 땅 속에 있는 물의 표면에 닿는 빛은 미미했다.
그 빛이 아무리 밝더라도 어둠 속에 가라앉은 물은 훨씬 깊었나 보다.
울프의 <올랜도>와 포스터의 <모리스>에 비해 너무나 불행하고 안타까운 끝맺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