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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그건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이야기인데.... 얘기해봐. 어떻게 만났는데? 무척 사랑했던 모양이죠? 그 표정을 보니."
둘 만의 추억은 기억이 되어 남고, 그 기억은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는 때로는 윤색되어 조각난 파편들이 실제와는 다르게 만나 붙어버리기도 하고 그러한 까닭에 불쾌했던 기억은 사라지고 고통과 슬픔마져 아름다운 이야기가 된다. 어느 한 쪽은 그 메타세쿼이아 나무를 바라보고 그 나무 아래 편지를 묻으며 여기가 <세계의 끝>이라 여겼을지도 모르지만, 그 다른 한 쪽은 그 어느날의 무심했던 기억으로 그때를 잊고 살아갈지도 모른다. 어느 날 도착한 한 통의 편지를 받고,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다. 어쨌든 한 사람의 기억 속에서나마 그 사랑의 기억은 남았다. 꼭 두 기억의 조각이 맞아떨어져야 할 필요성도 의무도 없기에, 때로는 지나간 사랑이 더 강렬하고 아름답다.
이제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담긴 사랑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잠든 강가의 잔 물결을 일으키던 낯 익은 옛 노래는, 거센 비바람에 휘어져 날아가 버렸던 장마철의 우산은, 가을 대천의 밤바다와 졸린 눈을 비비던 기차역은, 이야기로 되살아나 다시 누군가에게 이해되기를 바라며 긴긴 오랜 세월을 버티고 있었다. 그들은 무척 행복했고, 또 무척 슬펐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렇듯 <세계의 끝>은 때로는 너무 허무하게도 기껏해야 여기, 라고 탄식할 정도로 가깝고 평범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오히려 나를 더 저릿하게 만든다.
희선은 왜 그리도 제자의 사랑을 찾는 데에 골몰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진짜' 사랑을 경험한 누군가가 다른 이의 사랑 이야기를 추억함으로써 자신의 사랑에 대한 기억을 복기하고 싶었던 욕심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누군가의 저릿한 사랑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마다의 가슴 속에 자리하고 있는 자신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되니까.
그 다음에는 종현이 얘기했다. 택시를 운전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을 얼마나 하찮은 존재로 여겼는지, 그럼에도 이 세상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이 어떻게 자신을 위로했는지, 또 옆좌석이나 뒷자석에 앉아 있는 동안 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지, 어떤 경우에도 앞만 바라보면서 그저 냄새만으로 그 사람들이 먹은 식사와 그 사람들의 경제적인 상황과 그 사람들의 직업을 짐작하는 일이 얼마나 고독한 것인지, 그러다가 어느 날 새벽에 본 그 불길은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얼마나 참혹했는지, 또 자신의 미래는 얼마나 어두운지에 대해서. 나는 그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다.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들으려고 무척 귀를 기울이며. 또 그의 두려움을 이해하려고 애쓰며. 한편으로는 집에까지 가는 길을 세세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택시가 서울에 한 대 정도는 있어서 다행이라고, -115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그럴 때면 그들의 인생이란 이야기에 있는 게 아니라 그 이야기 사이의 공백에 있는 게 아닐까는 생각마저 들어. 그런데 편집은 목소리 사이의 공백을 없애는 일이잖아.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에서 기침이나 한숨 소리, 침 삼키는 소리 같은 걸 찾아내서 없애는 거야. 그러면 이상하게 되게 외로워져. -237
"그럼 할 말은 여기서 할게. 알래스카 코르도바에 마리 스미스라는 에야크 인디언이 살아. 이 지구상에서 에야크어를 사용하는 마지막 인간이야. 사람들이 그 소감을 묻자,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대. '그게 왜 나인지, 그리고 왜 내가 그런 사람이 된 건지 나는 몰라요. 불면한 건 마음이 아프다는 거죠. 정말 마음이 아파요.' 듣는 사람이 없으면 말하는 사람도 없어. 세계는 침묵이야. 암흑이고." -249
"내가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내가 마치 거기에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마주 앉아 있어도 내 얼굴을 보지 않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죠. 한 번은 몹시 추운 겨울날 목도리를 두르고 밖에 나간 적이 있어요. 내가 지팡이를 두들기고 지나가니까 시각장애인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죠. 바람이 어찌나 세차게 불어대던지. 그때 어떤 아줌마가 나한테 '아차피 앞도 안 보이는데 그냥 목도리로 얼굴을 다 감아버리지, 왜 목만 가리느냐'고 묻습디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차피 나는 앞을 볼 수 없으니까. 그 말은 어차피 남들이 나를 볼 수 없으니까, 라는 말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내 존재 자체가 사라져요. 시각장애의 핵심은 내가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보여져야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75 <달로 간 코미디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