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미터O
이준영 지음 / 황금가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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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부부터 혼을 쏙 빼어 놔 정신을 못차리게 만드는 소설이 있고, 도입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전개를 보여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하는 소설이 있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흔히들 말하는 잘나가는 소설의 기본 공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파라미터O는 어딘가 오싹한 기분을 자아낸다.


분명 속도감 있게 잘 달리고 있는 열차에 오른 것 같은데, 왜인지 그 열차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것만 같고


길을 잃은 고속도로에서 맘씨 좋아 보이는 할머니에게 히치하이크를 성공해 올라탔지만 왜인지 그 할머니에게서 살인자의 향기가 나는 것만 같은 그런.





파라미터O의 세계관은 종말 이후의 모습이다.


인간은 생식 기능을 잃었고, 건강한 인간의 유전자는 씨앗 탱크에 보관되어 다시 도래할 그 날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더는 두 눈, 두 귀, 두 손, 두 발이 멀쩡한 인간이 태어나지 않았고 온전한 한 사람의 인간이란 너무나 먼 과거의 일만 같다.


태양 전지판을 돌려 얻어낸 전기로 쾌감기란 기계를 가동하고 그 속에 갇혀 자신이 원하는 환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보호복이 없이는 밖으로 나설 수도 없는 작은 벙커안에서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다.


그 작은 사회를 지키고 있는, 대체 불가능한 인력 조슈.

조슈는 우연한 기회에 새로운 기계종 이브를 발견한다.


더없이 사람같지만, 사람의 모습은 아닌 이브.

주인공 조슈를 창조주라 부르는 이브는 창조주답게 자신에게 새로운 목적을 부여해 줄 것을 요구한다.


이브의 삶의 목적이 될 명령어를 입력할 수 있는 창, 파라미터O


이 소설은 그로부터 시작하고, 다시 그곳에서 끝을 낸다.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은 쉽게 쓰여진 소설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또 마냥 어려운 소설도 아니다.


하지만 이런 설명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싹한 그 기운을 직접 느끼는 것이 훨씬 정확하지.


주저하고 있다면 주저없이 구매해도 좋을 것이다.

젠체하며 가르치려 드는 딱딱하고 어려운 SF 소설들과는 차원이 다른 소설을 보게 될테니까.




소녀는 창조주에게 묻고 싶었다. 자신이 태어난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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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쓴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기에, 더더군다나 까다로운 책 일수록 서평을 쓰기 전 몇 번이나 고민하고 망설이다 쓰게 되는 것 같다. 아마 그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이 '책'에게는 너무나 까다로운 잣대를 들이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 보자. 필자의 경우 따뜻한 계열의 색감을 가진 옷들은 심각할 정도로 안 어울리는 데다, 일반 티셔츠는 다 합쳐서 두 장 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필자가 "난 저 샛노란 티셔츠는 싫어"라고 한다면, 설사 필자의 성향을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네 취향이 아니구나" 라고 하지 "저 티셔츠는 별로인가보네"라고 하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 때문에 서평이라는 것은 상당히 조심스럽고 세심하게 이루어져야 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저 책은 별로야" 라는 내 말이 "저 책은 (모두에게) 별로래" 라는 식으로 받아 들여 질 수 있고 "(배경 지식이 있어서 골라 들을 수 있는 나에게는) 저 책 괜찮더라"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저 책은 괜찮데!" 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설이 길었지만, 어찌보면 꼭 필요한 이야기이기도 하기에 장광설을 늘어 놓아 보았다. 이 책은 그만큼 까다로운 책이기도 하니까. 어찌 보면 그저 이 시대를 이끌어 나가는 여성 철학자들의 사유를 병렬식으로 나열해 놓은 것 같은 책이지만 필자에게는 여러가지 도전을 주었던 책이기도 하다.


본격적인 서평을 시작하기에 앞서 말해두자면, 이 책은 페미니즘 적 요소들이 곳곳에 녹아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요즘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그' 페미니즘 책과는 거리가 있다. 남성 중심, 백인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철학과 시대 흐름 속에서 묻히기 쉬운, 여성 철학자들의 이야기를 다루자는 것이 주요 취지이고 여성들의 삶과 철학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 페미니즘으로 읽히기는 하나 페미니즘 철학이라 부르기에는 다소 문제 소지가 있는 부분들도 존재한다.


필자는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고 굳이 성향을 정하자면, 교차 페미니즘을 지향하는 사람이며 철학에 있어서도 기본적인 수준의 상식은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에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사상과 비교분석해 가며 더 공부해야 할 것, 내 사상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것,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여성에게 그리고 더 나아가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을 분류해가며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페미니즘을 전혀, 아주 기초적인 지식도 없는 사람 혹은 강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 철학은 듣기만 해도 자는 사람에게는 이 책을 추천하지 않고 싶다. 무분별한 정보의 습득은 차라리 무지보다 더 위험한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페미니즘에 대해서 관심이 있고, 알아볼 의향이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읽고, 고뇌하고, 찾아보고, 자신만의 페미니즘을 완성해 나갔으면 좋겠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상당한 존재 가치와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내용 구성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크게 6개의 소단원으로 되어 있어 굳이 순서대로 읽지 않더라도 나에게 가장 필요한, 내가 관심이 있는 영역에 대해 먼저 읽거나 그 부분만 읽을 수 있게 되어 있는데, 그것이 내게는 더없이 매력적인 요소였다.


또, 이 책의 3장 일, 4장 두려움 이 두 챕터는 넘기는 매 페이지마다 내 깊은 한숨이 묻어 있을 정도로 깊이 있는 논의가 들어 있었다. "왜 우리는 여성에 대해 논해야 하는가", "왜 이 사회는 잘 못 되어 있는가"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들과 무의식 중에 넘기고는 잠재 의식에 남아 괴로워했던 여러가지 기질들에 대한 사유가 가득 담겨 있는 이 두 챕터는 여성들이라면 분명 기뻐하고 또 공감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인터뷰와 작가 개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책이기 때문에 읽기에 까다로운 책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필자가 이 책을 어렵고 까다롭다 칭한 것은 별 거 아닌 것 같아 보이는 한 줄 한 줄에 사유할 거리가 넘쳐나기 때문이었다.


사유하는 힘이 줄고, 그저 휩쓸리듯 살아가고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여성들에 대해 사유하는 여성이 늘어나길 바라며, 이 책이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 주길 바란다. 

어떻게 스스로를 팔지 않고 일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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