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당신은 지나치게 애쓰고 있어요 - 돌봄 중독에 빠진 사람들을 위한 사이다 힐링
썸머(이현주) 지음 / 북드림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가 타인의 문제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달려드는 이유가 있다. 지금까지 우리를 둘러싼 주변에서 벌어진 문제에 그 누구도 신경 쓰거나 책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책 속의 한 문장>
비틀즈의 ˝Let it be˝가 생각난다. 그냥 흘러가게 내비둬야 하는 용기가 필요한 순간들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녁을 먹고 나면 모두 식탁에 둘러앉아 민트 티나 자메이카 티를 마시며 샘의 이야기를 듣곤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존경스럽고 악의가 없으며 훌륭한 사람들 - 열심히 일하는유능한 주부, 부지런하며 검소한 소상인, 소박한 행복을 쌓기 위해 너무도 열심히, 또 정직하게 일해 왔고, 이제 충분한 자격으로 그 행복을 즐기기 시작한 사람들 - 에게 불행이 닥치는 것을 볼 때 당혹감을 느낍니다. 이제부터 해야 할 말을 어떻게 하면 최대한 부드럽게 전달할 수 있을까요? 적대적인 독자들은 지금부터 설명하고자 하는 모든 고난을제가 개인적으로 책임져야 할 것처럼 생각하리라는 것을 알지만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세례 받지 못한 유아들이 지옥에 가길 원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과 똑같이 그런 오해를 받는 것이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만약 한 사람이라도 진리에서 소외시키게 된다면, 그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독자 여러분에게 부탁하건대, 이처럼 행복을 누릴 가치가 있는 사람들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아무리 그들이 소박한 성공을 거두고 그자녀들이 행복을 누린다 해도 그것만으로 복된 존재가 될 수는 없다"
고 생각하시는 것이 참으로 옳은 일일 수 있음을 잠시 동안만이라도 믿어 보시기 바랍니다. 즉, 이 모든 성공이나 행복은 결국 그들에게서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 알기를 배우지 못하는 한 그들은 비참해질 수밖에 없음을 믿어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려움을 주심으로써, 언젠가는 그들 스스로 발견해야할 부족함에 대해 미리 경고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들과 그들의 가족은 현재 누리고 있는 삶 때문에 자신들의 필요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삶을 덜 달콤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겸손이라고 부르는데, 왜냐하면 배가 이미가라앉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백기를 드는 것은 궁색한 일이기때문입니다. 최후의 수단으로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더이상 지닐 가치가 없어졌을 때 비로소 ‘자기 것‘을 바치는 것은 궁색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분이라면, 그런 조건에서는 우리를 받아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만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낮춤으로써 정복하시는 분으로서, 우리가 언제나 그분보다는 다른 것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붙들 나은 것이 없기 때문에 그분께 나아가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독자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성경 이야기, 즉 우리의 두려움게 호소하시는 하나님이 등장하는 그 모든 이야기 속에서도 우리는 똑같은 겸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옥 대신 하나님을 선택한다는 것은 그분께 경의를 표하는 태도가 못 됩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 까지 받으십니다. 스스로 자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피조물의 환상은 본이 자신을 위해 깨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이 훼손되는 데 개의치 않은 채‘, 현세의 어려움이나 그 어려움을 두려워하는 우리의마음을 통해, 또 영원한 지옥의 불꽃을 겁내는 조잡한 두려움을 통해그 환상을 깨뜨리십니다. 성경의 하나님이 좀더 순수하게 윤리적인 분이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칸트 철학에 따라 가장 순수한 최고의 동기를 가지고 나아가지 않는 한 우리를 받아 주지 않는 분이 라면, 과연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자족의 환상은 대단히 정직하고 친절하며 온화한 사람들에게 가장 강하게 나타날 가능성이 있으므로, 불행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명백한 자족의 위험은, 우리 주님이 무능하고 방탕한 자들악을 세속적인 성공에 이르는 악보다 훨씬 더 너그럽게 대하셨던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창녀들은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할 정도로 현재에 만족할 위험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만하고 탐욕스러우며,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럴 위험이 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존경스럽고 악의가 없으며 훌륭한 사람들 - 열심히 일하는유능한 주부, 부지런하며 검소한 소상인, 소박한 행복을 쌓기 위해 너무도 열심히, 또 정직하게 일해 왔고, 이제 충분한 자격으로 그 행복을 즐기기 시작한 사람들 - 에게 불행이 닥치는 것을 볼 때 당혹감을 느낍니다. 이제부터 해야 할 말을 어떻게 하면 최대한 부드럽게 전달할 수 있을까요? 적대적인 독자들은 지금부터 설명하고자 하는 모든 고난을제가 개인적으로 책임져야 할 것처럼 생각하리라는 것을 알지만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세례 받지 못한 유아들이 지옥에 가길 원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과 똑같이 그런 오해를 받는 것이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만약 한 사람이라도 진리에서 소외시키게 된다면, 그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독자 여러분에게 부탁하건대, 이처럼 행복을 누릴 가치가 있는 사람들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아무리 그들이 소박한 성공을 거두고 그자녀들이 행복을 누린다 해도 그것만으로 복된 존재가 될 수는 없다"
고 생각하시는 것이 참으로 옳은 일일 수 있음을 잠시 동안만이라도 믿어 보시기 바랍니다. 즉, 이 모든 성공이나 행복은 결국 그들에게서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 알기를 배우지 못하는 한 그들은 비참해질 수밖에 없음을 믿어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려움을 주심으로써, 언젠가는 그들 스스로 발견해야할 부족함에 대해 미리 경고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들과 그들의 가족은 현재 누리고 있는 삶 때문에 자신들의 필요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삶을 덜 달콤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겸손이라고 부르는데, 왜냐하면 배가 이미가라앉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백기를 드는 것은 궁색한 일이기때문입니다. 최후의 수단으로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더이상 지닐 가치가 없어졌을 때 비로소 ‘자기 것‘을 바치는 것은 궁색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분이라면, 그런 조건에서는 우리를 받아 주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만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낮춤으로써 정복하시는 분으로서, 우리가 언제나 그분보다는 다른 것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붙들 나은 것이 없기 때문에 그분께 나아가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독자들을 곤란하게 만드는 성경 이야기, 즉 우리의 두려움게 호소하시는 하나님이 등장하는 그 모든 이야기 속에서도 우리는 똑같은 겸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옥 대신 하나님을 선택한다는 는 태도가 못 됩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까지것으 그분께 경의를 표하는 태도가 못 됩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 까지 받으십니다. 스스로 자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피조물의 환상은 본이 자신을 위해 깨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이 훼손되는 데 개의치 않은 채‘, 현세의 어려움이나 그 어려움을 두려워하는 우리의마음을 통해, 또 영원한 지옥의 불꽃을 겁내는 조잡한 두려움을 통해그 환상을 깨뜨리십니다. 성경의 하나님이 좀더 순수하게 윤리적인 분이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칸트 철학에 따라 가장 순수한 최고의 동기를 가지고 나아가지 않는 한 우리를 받아 주지 않는 분이 라면, 과연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자족의 환상은 대단히 정직하고 친절하며 온화한 사람들에게 가장 강하게 나타날 가능성이 있으므로, 불행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명백한 자족의 위험은, 우리 주님이 무능하고 방탕한 자들악을 세속적인 성공에 이르는 악보다 훨씬 더 너그럽게 대하셨던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창녀들은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할 정도로 현재에 만족할 위험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만하고 탐욕스러우며,
자기 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럴 위험이 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치심은 그 감정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얻게 되는 통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 통찰이 각 사람의 마음속에 항상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통찰에 수반되는 고통스러운 감정까지 장려해야 하느냐 하는 것은 영적인 지도가 필요한 전문적인 문제로서, 평신도인 제 가 다룰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도 일단 제 의견을 밝힌다면, 구체적인 죄를 회개하는 데서 나오는 슬픔, 그리하여 구체적으로 자기 잘못을 바로잡거나 남에게 끼치 해를 보상하게 만드는 슬픔이나, 남을 향한 연민에서 솟아나 적극적으로 그를 돕게 만드는 슬픔이 아닌 한, 슬픔은 정말 나쁜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