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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꼭두각시
윌리엄 트레버 지음, 김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평점 :
절판
[126] 운명의 꼭두각시
『운명의 꼭두각시』의 작가 윌리엄 트레버의 이력은 화려했다. 그랬음에도 그는 나에게 낯선 작가였다.
데뷔 이후 휫브레 드상(현 코스타상) 3회, 오헨리상 4회, 래넌상, 왕립문학협회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받았고, 다섯 번의 부커 상 후보 외에도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수차례 거론되었다. 문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7년 대영제국 훈장 사령관 수훈을, 1994년 문학 훈위 칭호를 받았으며, 1999년에는 영국 작가가 받을 수 있는 가장 영예로운 문학상이라 불리는 데이비드 코언상을 수상했다. 2002년 평생의 업적과 공헌에 대하여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기사 작위를 받았고, 줌파 라히리,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등이 많은 영향을 받은 작가로 손꼽았으며, 아일랜드의 대통령 마이클 허긴스는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뛰어난 업적을 이뤄낸 우아함을 지닌 작가'로 표현한 바 있다. 2016년 11월 20일 88세로 세상을 떠난 그는 생전 수 백 편의 단편과 18권의 장편소설을 발표했고 대표작으로 <비 온 뒤> <여름의 끝> <루시 골트 이야기> <그의 옛 연인> <밀회> 등이 있다.
1918년 봄, 여덟 살의 윌리의 삶은 평온했다. 그는 역사 수업에서 “그게 모든 것의 끝이어야 했어. 전혀 새로운 아일랜드의 시작, 하지만 물론 그렇지 못했지. 전쟁을 신뢰해선 안된다.(p16)”라는 킬개리프 신부의 단언을 이해하지 못했던 아니 이해할 수 없었던 파란 눈의 평범한 어린 소년이었다.
1차 세계대전 직후 전쟁에서 돌아온 도일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제분소에 일꾼으로 다시 고용되지 않았다면 저택의 사람들은 살아남았을까? 혁명군의 지도자 마이클 콜린스가 킬네이 저택에 윌리의 아버지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윌리의 삶은 달라졌을까?
고조되는 아일랜드의 독립투쟁을 막고자 영국이 파견한 단체 ‘블랙 앤드 탠즈’의 러스킨 중사는 자신에게 동네 정보를 가져다주는 도일의 죽음에 대한 보복으로 한밤중 킬네이 저택을 급습하고 이 일로 윌리의 아버지와 여동생들과 저택의 사람들이 처참한 죽음을 맞는다.
구체적인 설명이 아닌 포괄적인 표현으로 되어 있는 문장들이 직접적인 잔혹함으로 와닿지는 않지만 윌리가 처한 상황이나 알코올 중독자가 되는 어머니의 상황을 더 처절하게 느끼게 만든다.
독립전쟁 이후 이어진 내전이 끝나고 아일랜드에 평화가 머뭇머뭇 어렵게 찾아오는 킬네이에서 윌리는 낯섦과 친숙함에 조금씩 익숙해져가면서 느린 속도로 제분소 일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여전히 지난 시간의 악몽 속에 벗어나지 못하는 윌리의 엄마는 술로 시간을 견뎌보지만 결국 자신이 만든 상실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스스로 삶을 포기하고 만다.
이제 윌리에게는 아무도 없다. 고모와 이모가 윌리에게 그 어떤 것도, 그 무엇이 되어주지 못한다. 그에게는 메리앤을 향한 사랑만 남았을 뿐이다. 킬네이 저택의 새 하녀 조세핀의 충고대로 놓지지 말아야 한다. 그에게 그 사랑은 선물 같은 것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선물이다. 그럼에도 윌리는 메리엔의 사랑을 놓친다. 아니 잡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또 하나의 비극이 생겨나고 아픔은 또 윌리와 메리엔의 딸 이멜다로 이어진다.
소설은 삶에서 상실로 생겨나는 아픔이 삶을 지탱할 수 없게 만든다는 사실과 한 걸음 한 걸음 내 딛는 일이 엄청난 일을 겪은 사람에게는 말처럼 쉽지 않다는 현실과 현실과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가혹한 운명에도 그 운명을 이겨나가게 하고 살아남게 하는 한 가지가 반드시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읽고 나서 오래전 MBC 드라마 <아일랜드>에서 배우 이나영이 연기했던 이중아가 생각났다. 입양되어 북아일랜드에서 살게 된 그녀가 IRA 단원인 오빠로 인해 죽음을 맞게 된 가족을 외면하고 혼자만 살아남아야 했던 그 시간이 떠올랐다. 결국 이중아를 살게 남게 한 것도 또 살아 갈수 있게 한 것도 가족들과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선물 같은 ‘사랑’이었다.
남들 눈에는 이해되지 않는 모습의 사랑이 스스로를 구원하게 만들기도 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운명의 꼭두각시들도 시간의 소용돌이에서 스스로를 구원해 낼 힘이 있고 그 힘으로 살아갈 것이라 믿는다.
아일랜드엔 정의가 살아 있지 않고 아일랜드를 바로 세우는 데에 꼭 아일랜드인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 어머니가 주장하는 바였다.(p45)
비록 여동생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며 그 사실을 숨기려 애쓰지만, 나는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었다. 난 그 누구보다도 아버지를 사랑했다.(p71)
당신 방 앞에 선 나는 아주 가볍게라도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그저 문을 열었다. 모든 두려움과 도덕이, 세상의 모든 잣대가 내게서 사라졌다. 난 아무것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당신이 알아야 한다는 것 말고는,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면 당신이 적어도 약간의 위안을 얻을지 모른다는 것 말고는. 난 램프를 화장대에 올려놓고 당신 이름을 불렀다.(p198)
그 염려가 우리의 여름과 우리의 사랑을 선물했고 그 사랑은 우리에게 우리 아이를 선물했지요. 킬네이에서 난 당신을 기다릴 거예요. 당신이 이 세계를 떠도는 동안 난 어떤 가혹한 운명에도 살아남을 겁니다. 외로움이 당신을 사로잡았다는 걸 난 이해합니다.(p264)
이멜다 퀸턴은 내 이름, 아일랜드는 내 조국. 불탄 집은 내 거처, 천국은 내 목적지. 시멘트 건물 앞에 하얀 성모 마리아 상이 있는 로크의 새 가톨릭 학교에는 압운 열풍이 불었다. 이멜다는 필사 책 표지 안쪽에 이 말을 적었다. 단어들이 오렌지색 표면에서 단정하게 찰랑거렸다.(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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