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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운
티파니 D. 잭슨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평점 :
[048] 그로운
『그로운』의 주인공 챈티의 모습은 강렬하다. 그만큼 애달팠다. ‘꿈을 좇는 일이 악몽으로 변해버린 소녀의 핏빛 성장담’이라는 날 것의 표현과 챈티의 “어른들의 세상은 나를 널빤지 아래로 떠밀어 악어들의 먹잇감으로 만들었다.(p357)”는 문장이 세상을 향한 외롭고 뜨거운 외침으로 들렸다.
읽는 내내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게 만든다. 맬컴 엑스는 “미국에서 가장 무시받은 사람은 흑인 여성이다. 미국에서 가장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은 흑인 여성이다. 미국에서 가장 방치되는 사람은 흑인 여성이다.(p364)”라고 했다.
무시받고, 보호받지 못하며, 방치된 흑인 소녀는 빨리 성장해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노래할 수 있기만을 바랐다. 단지 그뿐이었다. 자신의 꿈을 위한 선택이 스스로를 나락으로 빠지게 만든 선택이 된 챈티는 세상으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함에도 피해자가 되어 미지의 세계로 밀려났다가 간신히 자신의 세계로 돌아온다.
2017년 청소년 범죄를 다룬 미스터리 스릴러 『혐의 Allegedly 』로 데뷔해 흑인 소녀 중심의 흥미진진한 서사로 각광받는 베스트셀러 작가 티파니 D. 잭슨은 월터 딘 마이 어스상, 코레타 스콧 킹-존 스텝토 신인작가 상을 수상했으며, 맬컴 엑스의 청년 시절을 다룬 소설 『맬컴 엑스의 각성 The Awakening of Malcolm X 』에 공저자로 참여할 만큼 필력을 인정받는 작가다.
그녀의 네 번째 장편소설인 『그로운』은 출간 즉시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기록했고 퍼블리셔스 위클리, 혼 북, 미국 도서관 협회 등에서 “신체적·성적·감정적 학대를 들여다보는 심장 뛰는 스릴러”이자 “이야기를 서서히 고통스럽게 쌓아나가며 충격적이고 오싹한 절정에 다다르게 하는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전생에 인어였다고 그래서 깊은 바닷속에서 살며 자유롭게 수영하며 갑각류를 먹고 다섯 옥타브의 발라드를 불렀다고 믿는 열일곱 살의 주인공 인챈티드는 학교 수영장 샤워실에서 노래 연습을 하는 가수 지망생이자 수영 선수다.
짧은 머리의 흑인이라는 이유로 억측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매사 바르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그녀다. 친구 갭의 추천으로 오디션 프로그램에 지원하게 된 오디션장에서 전설적인 R&B 가수 코리 필즈로부터 찬사의 말을 듣는다. 이후 코리의 무료 개인 레슨을 받게 된 그녀는 부모님의 불안과 친구 갭의 외면을 뒤로하고 코리와 투어를 떠나면서 가수로서 성공할 기회가 왔다고 믿었다. 하지만 코리는 꿈과 사랑 그리고 챈티 가족들의 생계를 미끼 삼아 그녀를 정신적으로 지배해 성적인 착취와 폭력을 일삼는다.
삶을 되찾으려는 용기와 노력으로 코리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가족들 곁으로 돌아온 것도 잠시 어느 날 코리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챈티는 유력한 살인 용의자가 된다.
2000만 장의 앨범을 팔아치운 슈퍼스타 코리 필즈는 오랜 기간 소녀들을 대상으로 강간, 폭행, 감금, 불법 촬영 등의 범죄를 저지르고도 법망을 피해 다니며 명성을 유지한다. 그는 일반인을 단숨에 유명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권력과 어마어마한 경제력, 감미로운 목소리와 성적 매력, 인챈티드가 가난한 집에서 꿈을 펼치지 못하는 열악한 상황, 부모에 대한 반항심, 성인 남성과 만난다는 사실을 감추게 하는 수치심을 이용해 그녀를 자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게 만들고 사회로부터 고립시킨다.
이 소설은 그루밍 성폭력이 “가해자가 피해자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신뢰를 얻은 뒤” 행해지며 “피해자를 길들이고 가스라이팅을 일삼아 피해자의 정신 상태를 지배” 하는 범죄임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인챈티드는 특히 흑인 여성 피해자의 증언을 믿지 않는 미국 사회와 경찰, 코리에게서 이득을 보는 음악 업계의 묵인 때문에 코리의 폭력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피해자를 지원하며 코리의 실체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단체 ‘코리 어나니머스’의 노력과 흑인 커뮤니티 윌앤드윌로우의 뒷받침에도, 그녀는 코리가 살인으로 숨을 거두고서야 비로소 해방감을 느낀다.
챈티는 할머니가 말했던 얼빠진 왕자가 굼뜨게 찾아오기 훨씬 전에 바다에서 스스로를 구하고, 자기 삶을 꼭 붙잡고서 누가 뭐라 생각하고 말하든 개의치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했던(p391) 인어공주 에리얼처럼 다른 사람의 시선을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꿈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무대가 그리웠던, 무대 위에서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이 그리웠던 그녀는 모든 일을 겪은 뒤에도 자유롭게 하늘을 난다.(p294) 챈티가 수치심에 빠져 숨지 않도록 용기 낼 수 있게 만든 가족들과 친구 갭의 도움으로 비로소 인생의 봄을 맞이한다.
챈티 아버지인 테리의 말처럼 첸티의 잘못은 하나도 없다. 아주 조금도 없다. 다 큰 어른의 행동을 아이가 책임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자신의 꿈을 위해 세상 밖으로 나간것을 두고 잘못했다고 질책의 말을 한다면 꿈을 향해 세상 밖으로 나갈 사람이 누가 있을까? 내일의 희망의 꿈꾸고 있는 아이들의 목을 그 희망의 끈으로 조르는 어른의 잘못일 뿐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믿어주는 한 사람만 있으면 『그로운』(GROWN)할 수 있다는 것을 『그로운』을 통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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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투박하고 서투르다면 갭은 모델같고 자신만만하다. 내가 불안과 걱정이 심하다면 갭은 나이에 비해 차분하고 현명하다. 그 무엇도 갭의 평정심을 깨트리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백합으로 가득한 들판에 몇 없는 두 유색인 소녀다. 갭은 학교를 통틀어 내 존재를 과도하게 설명하지 않고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p43)
내 상처는 눈에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피가 흐른다.(p263)
삶을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물에 빠져 죽는 것과 무척 비슷하다. 물 위에 떠 있으려고 애쓰지만 옆으로 새로운 정보의 파도가 쓸려 와 나를 미지의 세계로 더 멀리 밀어낸다.(p280)
네 잘못은 하나도 없어. 아주 조금도 없어. 다 큰 어른의 행동을 아이가 책임져서는 안 되는 거야.(p284)
내 눈은 아주 또렷해. 다른 사람들이야말로 자기 눈앞에 있는 걸 못 보지.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단다.(p390)
코리는 내 가족과 친구에게서 나를 빼앗고, 내 자유를 빼앗고, 내 심장을 빼앗고, 내 노래를 빼앗았다! 몸속에 뜨거운 분노가 끓어오른다.(p418)
지금은 여름이지만, 나는 꼭 봄 같다. 다시 생기를 되찾고 꽃을 피우며 자라나는 식물 같다.(p4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