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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는 게 뭐 어때서 - 씩씩한 실패를 넘어 새로운 길을 만드는 모험
김수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평점 :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중 SBS에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열둘 살부터 그렸던 그림을 내려 놓았다. 스물다섯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스물여섯에 『도망치는 게 뭐 어때서』를 썼다.
작가는 미술을 그만두고 아나운서 준비를 해보겠다고 다짐했던 것도, 아나운서가 되어서 다른 일을 해보겠다고 박차고나온 것도 더 잘할 수 있는 일이나 더 좋아하는 일을 발견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할 수 없어서’ 도망친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막다른 길마다 도망치고 도망쳐서 여기까지 왔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니었다. 피하거나 쫓기어 달아났던 것이 아니라 막다른 길에 서 있는 자신을 스스로 구해 내어 새로운 길로 나아가게 전환을 했던 것이다.
살면서 누구나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있다.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바라던 방향이 아니고 원하는것이 아니라고 느껴질 때 그래서 그 경로를 바꾸고 싶을 때 그 자리에 주저앉기도 하고, 그만두고 다른 길을 택하기도 한다. 그것이 누군가의 눈에는 도망으로 보일 수도 있고 또 누군가의 눈에는 용기 있는 변화일 수도 있다. 내 눈에 작가는 용기 있는 변화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방송인이고 PD인 재재의 말처럼 이 책은 ‘살아가는 대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갈 용기를 주는 책’이고 작가김수민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그 도전으로 변화할 줄 아는 영화 투모로우의 ‘애니’였다.
사유의 정원으로 단련된 그녀의 사유와 문장들이 놀랍다.
CHAPTER 1 씩씩한 실패
그해 봄 나는 가난했다. 당시 내게는 융통할 애정도 나눌 온기도 기대되는 미래나 설레는 계획도 없었다. 궁상맞을 정도로 가난했던 나 자신을 견딜 수가 없어 결국 가난했던 봄의 사직서를 냈다.
동경으로 가득했던 상상 속의 아나운서와 직업인인 아나운서라는 현실 사이에 괴리가 컸다. 일하면서 아픈 것이 죄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이 가장 괴로웠다. 당시 나의 불행은 쉬면 나아질 단순한 슬럼프가 아니었다. 견디고 버티는 삶이 꿈꾸던 모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가난을 극복할 가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불행은 슬럼프? 아님 실패? 고민이시작되었다. 내가 가장 쥐고 싶었던 것은 ‘나의’ 행복, ‘나의’ 일, ‘나의’ 삶이었다. 그래서 무수한 말들을 뒤로하고, 고집스럽게 퇴사를 결심했고, 감행했다.
일을 완전히 그만두고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엄마에게 카톡이 왔다. ‘날개 달았을 때 하고 싶은 거 다 하렴’. 드디어 나에게자유의 날개가 생겼다.
나의 퇴사를 두고 소문이 무성했다. 돌이켜보면 하늘의 무게를 함께 버티는 사이인 가족들에게 새롭게 선택한 아낭운서라는 나의 선택을 책임지기 위해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 어른으로 ‘홀로서기’가 아닌 ‘함께 서기’를 하는 것으로 나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나를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 코미디언 박미선 씨가 양희은 씨에게 ‘그렇게 즐겁지 않았으니까’라고 한 답글을 보고서야 나를 지키는 일의 기본은 내 기분을 지키는 일이고 즐거운 일은 즐겁게, 즐겁지 않은 일은 즐겁지 않게 하면 됨을 알았다. 그럼에도 미래의 긍정까지 끌어다 쓴 나는 결국 ‘긍정 파산’을 했고 긍정을 대신할 것으로 분노와 슬픔, 기쁨과 강함이 필요했다. 이러한 감정으로 변화무쌍한 세상을 살기로 했다.
나는 팔자가 말해주는 것으로 아나운서가 된 것도 아니고 퇴사를 한 것도 아니다. 일을 그만둔 지금 입사 초기 나를 가장괴롭혔던 라디오 뉴스가 가장 그리운 업무가 되었다. 지나고 보면 별일이 아니다. 모든 것은 반드시 지나간다. 과거가 된실패를 목도하면 ‘멀리서 보니 다 작아 보이는 게 웃기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CHAPTER 2 원하는 삶의 궤도
아나운서 일을 그만둔 지금도 여전히 나는 내가 살아내고자 하는 궤도를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매일 내가 원하는방향으로 걷다 보면 어딘가에 도착해 있을 거라는 건 안다. 자격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하루하루 내가 원하는 모양새로 노력하며 살아낼 수 있다면 잘 사는 것이다. 나의 하루하루는 곧 ‘궤도’가 될 것이다.
돌이켜보면 아나운서가 되기 위해 내가 했던 열정의 쌩쇼들이 있었고, 예원학교 시절 독서모임이었던 ‘사유의 정원’으로퇴사 후 다시 충만해질 수 있었다. 쓸모없음을 견디는 일과 도비와 노비 사이에 어느 것으로 시간의 주인이 될지를 고민하며 내 꿈이 현실적인 꿈인지 아닌지를 수시로 점검해야 한다. 신입사원 시절 애기와 외계인 사이를 오가며 살았던 시간을 되짚어 보며 삶의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관계된 ‘의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의미는물건이나 대상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내가 만드는 일이다. 새삼 의미의 재정의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함을깨닫는다.
CHAPTER 3 무언가가 될 나이
퇴사 후 남은 대학 생활을 마무리했다. 진로를 바꾸는 것은 서식지 옮기기와 유사하다. 곁에 무엇을 두고 살아가는 지가내가 삶에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알리는 지표라고 들었다. 그리고 언제든 뭘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신에게 맞는 옷을 찾으려면 옷을 갈아입어야 하고 누구나 옷 갈아입을 땐 잠시 나체다. 우리는 언제나 답이 있는 물음보다 답 없는 물음을 더 많이 안고 산다. 때가 되면 안다. 지금이 한창 배울 나이인지 아니면 무언가가 될 나이인지. 그때의 나는 무언가가 될 나이가 아니었다. 사실 무언가가 될 나이 같은 건 없다.
이제 나는 ‘리트(LEET, 법학 적성검사)’를 공부하는 수험생이다. 그렇게 공부를 시작한 지 석 달 만에 임신을 했다. 내 세상이 끝나는 기분을 맞 본 임신 초기를 보냈다. 그렇게 두 번의 리트를 통해 스스로에게 무엇을 욕망하는가에 대해 묻고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내 실패가 쪽팔렸다. 나와는 달리 남편은 창피해하지 않았다. 어려운 시험이니 떨어지는 거라는 말에 수긍이 갔다. 당장의 결과가 나의 가치를 정하지는 않는다. 결과는 값으로 표현될 뿐 가치는 내 안에서 나온다. 가격과 가치를 분리해 생각해야 한다. 견고한 기준은 편협함을 초래한다. 무언가가 될 나이라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 어른과 성인의 차이가 뭘까? 요즘 부쩍 어른이란 ‘이해’+‘력’이 길러진 성인, 성숙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CHAPTER 4 완벽하진 않아도 충분한 우리
태어나서 이렇게 마른 남자를 처음 봐서, 처음 보는 남자라 당황했다. 신랑하고 결혼하게 된 건 어쩌면 삼프터는 국룰인나라에서 만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 번만 더 보려고 했는데 평생 보게 됐다. 영원히 살 것처럼 안일하게 굴다가는 타이밍을 놓친다. 진짜로 가지고 싶은 걸 가지면 그만이다. 기회는 한 번뿐이니 진짜로 원하는 것을 또렷이 해야 한다. 남편은 누군가의 그림자처럼 내 옆에 있어주었다. 내 결혼의 이유는 결핍된 부분이 달라서였다. 서로의 구멍 난 부분이 달라서 두 사람을 포개면 왠지 구멍이 전부 가려질 것 같았다. 완벽한 결혼이 아니라 ‘충분한’ 관계였다.
살아보니 ‘사는 게 별게 없어’라는 말은 ‘사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말로 들린다. 임신으로 엄마로 산다는 건 인간을제대로 인간으로 살아보게 하는 뼛속부터 가지고 태어났던 태초의 고난을 꺼내보는 담금질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받는 것에서 사랑의 능력을 더 키우고 싶게 만드는 반려견 똥꼬을 만나고 나서 주는 사랑의 기쁨을 배우고, 어린 시절부터 키우던 사랑이로 메멘토 모리, 시간의 유한함과 삶의 가능성의 무한함을 상기하고 있다. 삶에는 적절한 속도가 있다. 그리고 당장의 속도보다 중요한 것이 삶에는 분명히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은 온다. 어김없이 또 다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고 새로운 기회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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