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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는 잘해요 ㅣ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11월
평점 :
쉽게 죄를 저지르고 쉽게 사과하는 사회, 그리고 사람들
(정신이상질환자 복지)시설에서 안타깝게(?) 해방된 시봉과 진만은 시설에서 반장을 맡아 했던 '대신 사과하기' 로 돈을 벌어보려 한다. 이른바 '사과대행업'. 어찌보면 황당무계하고 또 다르게 생각하면 짭짤할 것도 같은 '사업아이템'을 통해 이기호는 비뚤어진 사회에 대한 독특한 알레고리를 만든다.
천연덕스런 얼굴로 대신 사과하고 '대신' 처절한 응징을 대신 당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사과의 본질을 생각하게 만든다. 인류는 예술을 통해, 그리고 삶을 통해 끊임없이 죄의 본질을 탐구해왔지만, 그에 반해 '사과'에 대한 고민은 부족했다. 사과는 하나의 피상적, 현상적 행위로 인식되며 죄를 청산하는 간단명료한 마무리 의식에 불과한 양 치부되어온 것이다. 그러나 사과는 단순한 현상적 행위가 아닌 또다른 본질이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사과를 요구하거나 사과를 할 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공식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대부분의 경우, 타인을 향해 엎질러진 어떠한 죄는 그역사성에 의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며, 그로 인해 정작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는 전혀 다른 형태가 되기도 한다. 그 전혀 다른 형태는 또한 관계와 사유의 새로운 차원을 연다. 아내를 버리고 떠난 남자는 어미의 상처까지도 오롯이 짊어지고 살아온 아이에게 사죄하고 보상해야하며, 죄 짓지 않는 자의 사과를 대신 치러준 시봉과 진만에게는 거꾸로 사과의 당사자의 자살이 사과해야 할, 그러나 할 수 없는 죄로 되돌아온다.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던 과일가게 남자와 정육점 주인은 그들의 관계를 잘못과 사과의 틀로 바라보게 보면서 모든 행위와 소통과정이 잘 잘못의 매커니즘에 함몰되어 버린다. 그런면서에 사과는 해결해야하는 감정을 위한 하나의 가능성이며 풀어야 할 관계의 실타래이기도 하다.
시봉과 진만의 어눌하고 일차원적인 사고로 가장한 이기호의 날선 시각은 다르게 보기의 가능성을 던진다. 독자에게 죄의 무게와 인간이 짊어 진 필연적인 죄의 굴레를 보여주되, 죄에 대한 언급과 성찰이라는 직구 대신, 방향을 선회하여 사과 이후의 죄라는 상황을 상정하는 것이다. 대신해줄 수 없는 사과, 내가 알지 못했던 사과, 사과를 함으로써 생겨나는 죄...
마구 죄를 권하는 이 속된 사회에도 알알이 살아 부서지는 사과의 처연한 뒷모습이 있다. 시봉이 목숨을 내어놓음으로 태어난 '나', 진만의 미래라거나, 남성에게 매춘하여 또다른 남성을 부양하는 시연의 눈물겨운 생존 자체가 그렇다. 진만을 손수 시설에 가져다 맡기고 정상적인 가면을 쓴 채 영어교사로 살아가던 진만의 아버지가 다시 제발로 시설에 등록해 자살하면서 생의 끝에 남긴 속죄행위 또한 의외의 반전이다.
세상에는 많고 많은 죄가 있고, 그것들이 저마다의 무게를 가지고 우리네 삶을 억압한다. 그 때 결국 구원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열어왔던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사과받지 못한 채 사과했던' 어리석고 힘없는 자들이 아니였는지. 그 초라하고도 빛나는 진실 앞에 콧날이 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