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자 -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로베르트 발저 지음, 배수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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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스스로 작아지고 싶었으며 작게 머물고자 했던 스위스인 로베르트 발저의 산문집이다. 로베르트 발저는 1878년 스위스 베른의 독일어 가정에서 출생하여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하인인 집사로 살다가 1956년 크리스마스에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그는 배우가 되고 싶었으나 꿈을 이루지 못했고, 열심히 글을 써서 발표했으나 정규 교육을 마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 또한 인정받지 못했다. 베를린 문학계에서는 이질적 존재였다고 한다.

 

가난했던 그는 거의 모든 시간을 밖에서 걸어 다녔다고 한다. 그의 산책은 그의 글이 되었으며 자신의 글 안에서 조차 내면의 산책을 말하고 있다. 글을 발행할수록 인정받지 못했으며, 폭음했고, 정신 질환에 시달렸다. 그는 불행, 고립, 가난을 앓았고,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았고 거주지도 없었으며 단 한 점의 가구도 소유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책은 아무런 시작의 말도 없이 42개의 산문이 불쑥 드러나 있다. 로베르트 발저가 아무것도 갖지 못한 채 어디에도 보호 받지 못한 느낌 같았다. 그러나 평생을 산책하며 보고 느낀 것을 말해주는 글의 형태처럼 느껴졌다.

 

책의 어느 곳을 읽어도 그의 말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어디선가 갑자기 불쑥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 책의 마지막 장에는 그의 사진이 있다. 나는 우산 한 개와 모자를 들고 마음으로 산책을 떠난 듯한 작가의 사진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책으로 들어갔다.



 

삶이 내 어깨를 붙잡았고, 비범한 시선으로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세상은 여전히 살아 있었으며 여전히 가장 아름다운 순간처럼 아름다웠다. 17

 

나는 별을 사랑하고, 달은 내 은밀한 친구입니다. 시간은 나에게 농담을 걸고, 나는 시간과 장난을 칩니다. 나는 근사한 대화 거리를 생각해 낼 능력이 없습니다. 76

 

작가의 마음이 글 안에 오롯이 나타나 있다. 선량한 청년인 자신의 주변에는 개나 염소와 같은 동물들만이 다가왔다. 작가는 아마도 세상 앞에서는 울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의 문장마다 마음이 아팠다.




말없이 견디기만 하는 자신들의 존재와 답답한 삶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어 했던 짐승들, 염소들, 개들, 그리고 송아지를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언어를 갖지 못하고 말을 할 수 없는 짐승들, 인간의 필요 때문에 갇혀 평생 노예로 사육 당하는 짐승들. 그 자신과 그의 친구들, 인간 친구들과 짐승 친구들 모두의 삶이 얼마나 암울한 상황 인지를 생각하니 청년은 더는 앞으로 걸어갈 수가 없었다. 그는 길 옆의 풀밭에 누웠다. 그리고 가슴이 터지도록 펑펑 울었다. 80


 



이 산문들은 어쩌면 작은 단편 소설 같은 글들이다. 갑자기 어떤 상황에서 느닷없이 그 한 장면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소설이란 어느 주인공들이 있고 사건이 있으며 그 사건의 전개와 위기 및 갈등이 있는 하나의 글의 집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어느 한 부분의 감정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자유롭다.

 

로베르트 발저는 실제 생활에서도 집 없이 평생을 길 위에서 떠돌았는데, 그의 글이 갖는 글 집의 기초 공사는 생략된 것 같이 오직 그 시간의 감정만이 드러나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어쩌면 그의 산문은 호흡이 긴 시일 수도 있다. 그의 글은 시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자 읽기가 쉬워졌다. 작가는 늘 이런 말을 글 속에 담아두었다. 따뜻하고 긍정적인 말들이다.

 



꿋꿋하게 참고 견뎌라. 좋은 날은 그 다음에 오리라. 좋은 날은 항상 우리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인내심이 장미를 피운다. 166쪽 


겨울에도 간혹 햇살이 눈 부신 환한 날이 있다. 얼어붙은 땅바닥을 디디면 얼음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눈이 내린 뒤라면 온통 부드럽고 푹신한 양탄자 위를 걷는 듯하다. 눈 쌓인 풍경은 그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168

 

산책은 나에게 무조건 필요한 겁니다. 나를 살게 하고, 나에게 살아 있는 세계와의 연결을 유지 시켜 주는 수단이니까요. 그 세계를 느끼지 못하면 단 한 글자도 쓸 수가 없고, 단 한 줄의 시나 산문도 내 입에서 흘러나오지 못할 겁니다. 339




 

로베르트 발저는 가장 본인 다운 삶 안에서 절대로 세상의 말에 굴복하지 않으며 글을 썼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가난한 작가는 집이 없으므로 아무 유산도 남기지 못한다고 한다. 남는다면 오직 그들이 쓴 책 뿐일 것이다그리고, 이 문장이 마음에 닿았다.


겨울 다음에는 언제나 봄이 기다리고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170


별처럼 빛나는 희망의 문장이란 가장 어둡고 춥고 쓸쓸할 때 문득 나타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로베르트 발저가 살았던 삶의 고단함은 희망에 대한 부지런한 문장의 수다스러움의 꽃을 피워 내었다. 마음 둘 데 없이 외롭고, 자존감이 없을 때 읽으면 위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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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리뷰어스 클럽의 추천으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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