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7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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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보던 것들이 낯설어지는 순간이 있다. 언제나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던 것들이 돌연 어딘가로 사라져버린다. 나는 곧 당황한다. 약속 같은 것이다. 늘 같은 풍경을 보여주리라는 믿음 혹은 기대. 매일마다 얼굴을 마주하는 나날들은 예측 가능한 기대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는다. 내일 별이 어디쯤 자리할 지 안다. 매일 밤 뜨는 달의 모양을 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반복되는 작은 기대와 보답들이, 이들이 만들어낸 신뢰가 나를 일상 속에 단단히 붙들어맨다. 하지만 언젠가 그런 기대들이 어긋나는 날이 온다. 있어야 할 것이 없다. 없어야 할 것은 있다. 그런 순간들은 낯익은 세계를 일순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시킨다. 이런 생경함은 이질적인 감각을 동반한다. 몸은 붕 뜬 듯하고 머릿속은 어지러이 뒤섞인다. 현실에 바싹 밀착된 사람들에게 생소함은 꿀결같은 감각을 선사한다.

그렇다면 몽상가는? 그는 늘 꿈꾸듯 산다. 도시에 말을 걸고, ‘마치 거미줄에 걸려든 파리처럼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을 장난 삼아 자신의 화폭에 짜넣으며’ 시간을 보낸다. ‘짧은 순간에도 무의식적으로 주위 모든 것에 시간을 낼 수 있는’ 그에게 꿈은 일상과 다를 바 없다. 그에게 낯섬 그리고 생경함이란? ‘멋진 밤이다.’ 혼자서 작은 소리로 꼭 뭔가를 흥얼거리던 그는 곧 ‘저만큼 앞에 어떤 여인이 운하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서’ 있는 여인을 발견한다. 그에게 이런 뜻밖의 광경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현실이다. 멋진 밤의 여인, 갈색 머리의 여인,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그 여인은 몽상가에게 있어 현실과의 접촉을 유지시키는 유일한 인물이다. 나스텐카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 밤이 그녀를 운명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사실 나스텐카의 이야기, 그리고 그녀와 몽상가가 함께하는 3일의 밤은 거의 통속 소설처럼 읽힌다. 그러나 결말에 이르러 그전까지는 동등했던 인물의 위치에 층이 생긴다. 나스텐카는 지워지고 몽상가만이 남는다. 3일의 밤은 그저 지극한 기쁨의 순간으로만 남는다. 마치 한편의 극과 같은 이 소설에는 사실 변화란 것이 없다. 몽상가는 몽상가로 남고 나스텐카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두 인물은 서로에게 한번 들어왔다 나간 것 뿐이다. 그래서 <백야>는 마음을 끈다. 몽상도, 현실도, 몽상가도, 나스텐카도, 그 무엇도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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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예술가의 초상
제임스 조이스 지음, 김종건 옮김 / 어문학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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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헌신하는 이는 세상에 등 돌리기 마련이다. 그는 자신을 거부하는 풍토를 멀리하고 스스로가 바라 마지않는 내적 삶을 꾸려가고자 한다. 그리고 그는 그런 자신을 옹호하기 위해 모든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의 시대는 이전에는 없던 시대다. 그 시대는 이전과 연속적인 흐름 위에 놓이기를 거부한다. 이전과는 달리 규정되기를 원한다. 세상은 스스로를 기술함으로써 자기체계를 확립하고자 한다. 이것이 당대의 소명이다. 그리고 시대는 자신의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 스스로를 끌어모으기 시작한다. 자신을 표상할 수 있는 모든 개념과 가치들을 그러모은다. 신앙, 민족, 기타 등등. 세상은 머지않아 제법 동질적이고 평탄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시대의 역사는, 이전 어느때 보다 역동적이고 거세게 주변부에 있는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린다. 이제는 누구도 역사와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누구도 역사와 독립된 상태로 존재할 수 없다. 역사는 참여를 촉구한다. 세상이 혁명을 호명하면 혁명을 부르짖어야 하고 확장을 바라면 확장을, 독립을 바라면 독립을 말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한 곳에도 속하지 않고 홀로 떨어져 나와 개인적인 뭔가를 꾸려나간다는 것은 요원한 일처럼 보인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변절이고 배신이다. 그러나 그는, 스티븐 데덜러스는 준비되어 있다. 그 모든 비난과 공격을 감당할 준비가, 모든 것을 끌어들이고 휩쓸리게 하는 역사에서 벗어날 준비가 되어 있다.

그의 반항은 홀로 준비된다. 동지를 찾아서는 안 된다. 동지를 찾은 순간부터 그의 반항은 하나의 운동, 하나의 투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사로 회귀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진정한 반항은 언제나 소요없이 조용히 준비된다. 이런 스티븐에게 아니, 이런 스티븐이기에, 현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있어 현실은 내적 세계의 이미지를 완성시키기 위한 질료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외부 세계의 대상물은 그 자신의 독백을 이어나가기 위한 일종의 수단인 것이다. 그렇기에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는 개인 간의 상호작용이 없다시피 하다. 모든 상호작용은 스티븐의 내부세계와 외부세계의 상호작용으로 환원된다. 그리고 상호작용에 참여하지 않는 이들은 그저 수사, 장식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런 수사들과 장식적인 단어들은 일종의 운율을 만들어낸다. 조이스의 수다스러운 단어들은 그가 그려내는 이미지와 분위기에 기여한다. 이런 작업은 과감한 것이다. 다양성이란 것은 너무나 쉽게 산만한 것으로 변모한다. 다양함이 다의성을 유지하기란 어려운 일이고, 그것이 총체적으로 어우러지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문장에 많은 재료를 투입할 수록 언어의 해석 가능성을 통제하는데 곤란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드러나는 문장들은 모두 제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예술을 말한다. 그들이 모든 예술을 대변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스티븐 그 자신과 그의 예술론만은 완벽하게 대변해내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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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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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도 닳는다. 언제까지고 같은 분위기 같은 향을 간직한 채로 나타나지 않는다. 누구나 아름다운 순간이 영속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보물처럼 빛나던 것들은 하나 둘 뒤로 물러나고 정신을 차려 보면 어느새 하나만을 남겨둔 자신이 있다. 유리알처럼 다양한 색채로 가지를 뻗어가던 그의 삶은 하나의 곧은 선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 끝에는 죽음이 있다. 이제 그의 삶은 죽음 아래 통일된다. 자신보다 먼저 눈 뜬 이들이 눈을 감고 자기 옆에 같이 달리던 이들도 이내 멈춰서기 시작한다. 사람은 혼자 닳지 않는다. 그가 닳아감에 따라 그를 둘러싼 세계도 같이 닳아간다. 그가 머물던 곳은 파헤쳐지고 그가 관계한 이들은 떠나간다. 어디를 봐도 항상 같은 맛이 난다. 그는 이미 선을 넘었다. 이제 더는 전과 같아질 수 없다.

에브리맨, 그는 어디에나 있을 법한 사람이다. 넘치지 않고 모자르지도 않다. 제법 성공한 데다 충분히 사랑하고 너무 이르게 죽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초인이 아니다. 결혼생활은 세 번이나 파탄났고 그는 무결한 사람으로 남지도 못했으며, 그 자신이 만족할 만큼 살지도 못했다. 그의 몸은 늘 병들어 있었고 그는 항상 실체없는 죽음, 오직 징후로만 나타는 죽음에 시달려야 했다. 처음에는 육체다. 육체가 충분히 병들고 난 이후에는 삶이다. 죽음은 곧 그의 삶을 병들게 한다. 이제 기억도 그의 편이 아니다. 병 걸리고 낡은 이가 떠올리는 기억은 그를 더 닳게 만든다. 무엇이 그의 삶을 병들게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필립 로스가 재현해낸 <에브리맨>의 장면들은 알아보기 어려운 순서로 배열되어 있어 그가 마침내 스러져야 했던, 기우뚱 거리기 시작한 지점을 특정할 수가 없다. 따지자면 모든 것이다. 그를 삶으로 이끌어온 모든 것들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필립 로스는 '죽음'을 테마로 하나의 삶을 재현한다. 하지만 죽음은 항상 징후로 나타난다. 향도 없고 무게도 없다. 그것은 맞닥뜨리기 전까지 결코 오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죽음은 필연적으로 삶 속에서 자신의 징후를 드러낸다. 죽음은 삶을 통해 조형되는 것이다. 형체 없는 징후와의 대면은 그의 삶을 그 혼자만의 것으로 만든다. 그는 그것에 어떻게 대항해야 할지 모른다. 그의 삶을 이제 현실을 벗어나 형이상학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필립 로스는 그 죽음을 '형체 없는 죽음'을 현실로 끌어내린다. 에브리맨은 무덤가에서 무덤 파는 남자를 통해 죽음이 어떻게 다루어지는지를 보고, 듣는다. 죽음이 어떻게 예우되는지를 본다. 이제 죽음은 현실이다. 두려움은 미지에서 온다. 그는 이제 자신이 어떻게 될 지를 안다.

필립 로스의 문체가 인상적이다. 건조한 문체로 쌓아올린 삶은 다른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의 인물들이 뱉어내는 말들은 그 자신들과 너무나 가까이 밀착되어 있어 그들이 달리 말했을 가능성, 다르게 행동할 가능성을 상상해 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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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베개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3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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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명실상부한 현대인이다. 알람 소리와 함께 깨어난 당신은 아침부터 분주하다. 정신없이 머리를 가다듬고 온 집안을 이러저리 왔다갔다 하면 어느새 전차 안이다. 일터에 도착한 당신은 한 켠에 커피 한잔을 놓아둔채 시간을 흘려보내기 시작한다. 째각째각, 째각째각, 당신의 몸짓에서 시계 바늘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언제가 이런 생활을 청산하고자 하지만 당장에 밀어닥친 하루하루에 급급하다 보면 당신은 어느새 시간에 떠밀려 저 멀리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그야말로 범을 타고 달리는 형세다. 한 번 인정에 얽히고 나면 벗어날 수가 없다. 그저 전차에 올라탄 채 끝없이 상승하는 사회와 함께 그대로 실려갈 뿐이다.

당신은 언제나 인정에 붙들려 사는 것이다. 당신의 이웃도, 이웃의 이웃도 그렇게 산다. 나도 그렇게 산다. 오늘은 즐겁고 내일은 서글프다. 어떤 날은 무겁고 또 다른 날은 가볍다. 내 마음 하나 멋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니 세상 일이라고 원하는대로 할 수 있을 리 없다. 우리가 인정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언제나 주체로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당신의 일을 제아무리 남의 일처럼 여겨보려 해도 당신의 일은 당신의 일이다. 가만히 놓아둘 수 없다. 어디로 흘러가는지 참참이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인정이다.

소세키는 인정을 멀리하고자 한다. <풀베개> 속 화공도 그리 하고자 한다. 그러면서도 근대 이후 인간은 그리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한다. 근대성은 어찌보면 닳고 닳은 개념이다. 상승하는 사회, 과거에 대한 부정, 새로운 자기 체계의 정립 이 모든 것들이 아직 유효하다. 탈근대를 말하기 시작한지도 벌써 꽤 많이 흘렀지만 아직 무엇이 탈근대인지 딱 잘라 말하기 쉽지 않다. 포스트모더니즘, 4차 산업혁명 시대, 포스트 코로나 시대 등등, 다름 이름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그 무엇도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금세 뒤로 떠밀려가고 만다. 그렇게 우리는 누군가는 유효성을 다했다고 말하는 근대란 이름 아래서 내일을 맞이하고 있다. 그리고 근대 이후 세상에 나고 자란 우리는 근대적 인간이다. 100년이 지난 소세키의 문제의식이 여전히 유효한 까닭이다.

근대성에 대응하는 방식이란 주제는 소세키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테마 중 하나다. <풀베개>에서는 '비인정'을 통해 그것을 그려보고자 한다. 그리고 소세키는 분명 그것을 그려냈다. <풀베개>에서의 장면장면은 몇장의 삽화 혹은 하나의 무성극처럼 보인다. 색이 빠진 그림처럼 보이는 장면들은 그리고 소리 없는 극처럼 보이는 장면들은 특유의 정적인 묘사를 통해 '인정'의 배제를 표현해낸다. 대문호라는 말이 괜한 것이 아니다. 한줄한줄을 읽어가다 보면 어느새 구름 위 도원이다.

도원은 아름답다. 딴 생각에 시달릴 필요도 없다. 그저 가만히 지켜보고 느끼면 된다. 하지만 어째선지 무언가 허전하다. 그렇다. 우리는 어찌나 저찌나 인간이기에 인정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도원에 평생을 머무르는 것도 나쁘지 않건만 소세키는 그곳에 근대의 발명품인 전차를 불러들인다. 그리고 그 전차가 몰고온 인정이, '연민'이라는 인정이 화공의 그림을 완성한다. "그거예요! 그거! 그게 나오면 그림이 됩니다." 인정도 마냥 나쁜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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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 이탈로 칼비노 전집 10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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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항상 읽는다. 문을 나서 마주치는 풍경, 그러니까 발을 딛고 선 단단하거나 약간은 무른 지표면을 읽고 머리카락 몇 올을 뒤로 넘기는 선선한 흐름을 읽는다. '좋은 아침'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면 이웃의 눈빛이 있고 그와 동시에 당신은 그의 눈빛과 그 눈에 비친 세상을 읽는다. 어떤 의미에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끝임없이 읽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당신은 '여행자'가 되어 아직은 당신 것이 아닌 세상의 미지를 감각과 기호를 통해 당신의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렇다. 당신의 세계는 당신의 것이다. 나의 세계와 같을 수 없다. 우리가 모든 걸 '똑바로' 본다면 당신과 나의 세계가 한없이 닮아 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상 그건 불가능하다. 당신이 그리고 내가 무언가를 읽을 때 그 순간에 항상 끼어드는 '무엇'이 있다. 그때의 풍경, 기분, 기억, 감각 당신이 인지하거나 인지하지 못한 모든 것이 당신의 시선에 섞여들어간다. 더군다나 당신의 시선은 내 시선과는 다른 것을 비춘다. 당신은 내가 지워버린 것을 보고 나는 당신이 지워버린 것을 본다. 그러니까, 당신은 무수한 상징과 기호의 세계를 산다는 말이다.

이탈로 칼비노의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는 읽는 것에 대한 책이다. 첫 장으로만 이루어진 열 편의 이야기와 그 이야기들을 읽어나가는 '당신'의 이야기가 이 책의 골자를 이룬다. '당신'은 이야기를 읽고 이야기속 인물들은 자기와 타인 그리고 자신들이 사는 곳을 읽는다. 얼핏 보기에는 제각기 다른 이야기들이지만 그들은 하나의 테마로 약간은 느슨하게 엮여있다. 깨진 유리처럼 파편화된 요소요소들은 어떤 양가적인 감정을 암시한다.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긴장 혹은 불안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읽어 낼 수 있다는 이야기의 가능성이다.

어떻게 보면 <어느 겨울밤 한 여행자가>는 이탈로 칼비노의 문학론을 소설의 형태로 담아낸 물건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파편화된 이야기들은 화자의 감정과 반복되는 장면 그리고 상징적 이미지를 통해 연속되고 그들은 또 '당신'과 당신에게 말을 걸며 책과 화자, 화자와 독자, 독자와 책의 경계를 흐린다. 삶이라는 하나의 연속성 아래에서 독서라는 행위에 개입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연결되고 교차되어 당신의 세계를 확장한다.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때로 암시를 통해 부분에서 전체를, 쓰인 것 이상의 의미를 읽어낸다. 하나의 이야기도 언제나 다르게 읽힐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재한다. 모든 것이 어디까지를 지칭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읽는 행위'는 '모든 것을 말하는 이야기'를 가능케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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