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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당한 사람들의 일곱 시 조찬모임
백영옥 지음 / arte(아르테) / 201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실연이 주는 고통은 추상적이지 않다. 그것은 칼에 베였거나 화상을 당했을 때의 선연한 느낌과 맞닿아 있다. 실연은 슬픔이나 절망, 공포 같은 인간의 추상적인 감정들과 다르게 구체적인 통증을 수반함으로써 누군가로부터의 거절이 인간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상처를 남길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 26
칼에 베인듯 치명적인 상처를 받은 사람에게 위로한답시고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치유가 될꺼라고, 사람에 의한 상처는 다른 사람으로 났는다고 하면, 그게 곧 위로가 될까. 사실 시간이 약이고 또 다른 사람으로 인해 나아진다는게 한참 뒤에 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깊게 베인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것이다.
봄인줄 알았는데 가을이란걸 알아챘을때, 이제 막 개나리가 진 줄 알았는데 물에 젖은 낙엽이 신발 바닥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걸 목격했을 때, 그때의 마음을, 머리와 빗장뼈가 동시에 울릴 때 나는 그 진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40
정수와 헤어진지 일년이 지난 L항공 비행 승무원인 윤사강은 모두가 잠든 새벽, 접속한 트위터에서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는 맨션을 보게 된다.
실연당했습니다.
스위치를 꺼버린 것처럼 너무 조용해요.
혼자 있으면 손목을 그을 것 같은 칼날 같은 햇빛.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제를 주최합니다.
실연 때문에 혼자 있기 싫은 분들은 저랑 아침 먹어주실래요? / 38
오래된 연인 현정과 헤어진 지훈은 옷장 속에 넣어 두었던 로모 카메라를 꺼낸다. 트위터에 올라온 '실연당'의 맨션 중에 '기념품을 내놓고 교환한다'는 내용에 충동적으로 참가의사 쪽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현실을 직시하게 해주는게 진짜 위로야. 무릎이 깨졌으면 당장 쓰리고 아프더라도 과산화수소를 퍼붓고 빨간약부터 발라주는게 위로라고 / 111
그리고 실연은 인생의 수많은 오답중의 하나일뿐이라고, 그래서 헤어져야 만나고 만나야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확신에 찬 정미도, 이 여자의 정체를 그대로 까발리고 싶지만 이 소설을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이끌고 스포의 중심인물이기도 해서 그대로 밝히면 이책을 읽는 분들에게 예의가 아닐 것 같아 생략하겠다.
모든 연애에는 마지막이 필요하고 끝내 찍어야 할 마침표가 필요하다 / 317
그러고보니 사강과 지훈의 공통점은 서로 먼저 헤어지자고 말을 한 쪽이다. 헤어지자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낸 상대를 만난 것 또한 같다. 그래서 그와 그녀를 차버렸지만 실연당한 두 사람, 그 실연을 치유하는 과정이 서로 만났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 이런 상태로라면 누군가를 또 만나도 상처는 곪아 터지고 말 것이다. 모 출판사 자녀교육서 독자기획단으로 몇개월을 활동하고 있어서인지, 이 소설의 끝으로 달릴수록 아동심리치료와 관련된 책을 읽는 기분이다. 심리치료상담전문가와 소통상담가의 책을 보면 결국 그 상처와 마주해야만이 치유가 된다고 하더라.
윤사강이 마침표를 찍기 위해 기념품으로 내놓은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책을 찾기 위해 지훈을 만나야 했고, 두사람의 깊은 상처가 남녀간의 사랑 때문만이 아닌 또 다른 사랑에 대한 부재, 그러니까 어린시절에 겪어야 했던 상처를 비로소 마주하고서야 그들은 그렇게 마침표를 찍는다. 진짜 어른이 되기 위해, 진짜 사랑을 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