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은 이렇게 시간 전쟁에서 패배한다
아말 엘-모흐타르.맥스 글래드스턴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1년 7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나에게 SF소설은 아서 C. 클라크, 윌리엄 깁슨, 아이작 아시모프로 대표되는 작가들이 미래 과학기술에 대한 상상력, 그 속에서도 인간의 삶과 고뇌를 담은 일종의 문학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어릴 때는 <유년기의 끝>,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뉴로맨서> 등 다양한 소설을 읽었지만 삶에 쫓기다보니 소설 등 문학보다는 비문학쪽 책을 많이 읽게됬는데 이번에는 오랜만에 SF소설을 접하게 되었다.

2. 출판사 황금가지는 이영도의 <피를 마시는 새>, 프랭크 허버트의 <듄>, 스티븐 킹의 <샤이닝> 등 판타지와 SF소설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한 번씩은 들어봤을 만한 소설들을 내가 중학교 다닐 때부터 냈던 곳이라 소설의 재미와 깊이는 보장됬다고 생각했다. 또한 SF소설계에서 휴고상과 네뷸러상은 밖에서 견주자면 노벨상에 가까운 것으로 동시 수상한 대표적인 소설들의 예는 <듄> <라마와의 랑데부> 등으로 SF소설 장르를 넘어선 문학미까지 갖추고 있는 작품들로 읽기 전 기대감이 매우 넘쳤다.

3. 소설은 시간 전쟁 속에서 대립하는 세력인 에이전시와 가든(정원) 속에 각각 속한 레드와 블루라는 여자 요원들이 서로를 추격자처럼 뒤쫓으면서 호기심에 편지를 교환하기 시작하면서 사랑에 빠지고 자신의 동료를 배반하면서 시간 전쟁 속에서 진정한 승리자가 되는 이야기로 큰 줄거리 자체는 전형적인 틀을 따르고 있다. 이 소설의 매력은 디테일들에 있는데, 첫째 편지라는 아날로그적 소재를 SF적인 분위기에서 잘 풀어낸 점이다. 초반에는 디지털이 많이 발달된 지금 시점에서도 편지를 잘 안 쓰는데 하물며 미래시대가 배경이며 각종 시간대를 넘나드는 소설에서 편지, 그것도 연애편지가 어울릴까 싶었는데 적대하는 세력의 요원끼리 비밀스럽게 연락하는 수단이라는 개연성이 있었고 때로는 조류의 모습, 때로는 화산 속 끓어오르는 화염의 모습, 진동하는 물 분자의 모습 등 SF다운 모습의 편지로 편지라는 소재를 어색하지 않게 하였다. 둘째 책 전체에 색을 잘 활용한 점이다. 각 장의 시작마다 빨간색이면 레드가 화자고, 파란색이면 블루가 화자를 표시해주고, 책 표지나 목차 등에도 파란색과 빨간색의 나선이 서로 꼬여 약간의 보랏빛을 나타내는 것은 전체적인 스토리를 함축하고 있다. 또한 편지에서 레드와 블루가 서로를 센스있게 지칭하는 말들 (무드 인디고, 블루디바디, 0000FF 등 모두 파란색을 지칭) 작품의 재미를 더해준다. 마지막으로, 각종 역사적 사건들이 등장하는데 의외로 동양에 관한 것도 많다는 점이다. 때로는 소크라테스와 같이 전쟁을 치르고, 스탈린과 같이 독일군과 싸우지만 징기스칸과 우정을 나누고 굴원과 이백의 시를 이야기하는 장면도 있다.

4. 반면에 조금 아쉬운 부분들도 있었다. 첫째, 시간 전쟁에 대한 묘사가 복잡해 초반에 스토리를 따라가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예전에 <나인폭스갬빗>을 읽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현대 SF소설은 설정을 미리 알고 읽는게 아니면 초반부에 막히기 쉬운 것 같다. 시간선을 왔다갔다하며 작은 변화로 목적하고자 하는 미래의 사건의 변화를 일으키거나 요원들의 전쟁 장면들에 대한 묘사가 이해가 안 가는 장면도 있었다. 둘째, 레드와 블루가 서로 사랑에 빠진 것의 개연성이 다소 부족하다는 점이다. 가정이나 인간적인 온정을 빼앗긴 채로 자란 둘이 호기심으로 시작된 편지를 통해 친해질 수는 있겠지만 서로 목숨의 위협을 느껴가면서 극도의 사랑의 감정을 느낄 만한 사건이 많이 부족해 감정선을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중단편(novella)으로 쓰여져 분량이 짧아서 그런지 몰라도 급전개인 감이 있어서 아쉬웠다.

5.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작가 두 명이서 편지 형태로 단시간 내에 이런 스토리를 구상하고 시간 전쟁이라는 SF적인 소재와 아날로그적인 편지를 엮고 스토리 전체에 색감과 다양한 소재들을 활용한 점이 이 소설의 특유의 매력인 것 같았다. <듄>이나 아서 C. 클라크의 소설과 같은 중후한 느낌은 없었으나 현대 SF소설에 대한 흥미를 다시 붙여준 책이다.

* 본 서평은 황금가지 출판사의 협찬에 의해 제공되었습니다

너와 나, 우리 둘은 어쩌면 그렇게도 이 전쟁이라는 커다란 전체의 축소판일까 하는 생각을. (중략) 우리 목적이 반드시 우리가 쓰는 수단을 닮는게 아니야 - P55

아무리 생각해도 난 읽음 표시 메세지가 더 마음에 들어. 그건 우리가 전파를 통해 느린 텔레파시로 나누는 인스턴트 악수 같은 거니까. 하지만 이 편지라는 것도 그 나름의 한계 안에서 멋진 기술이야. - P64

전투가 끝나면 나는 거의 불사신이 된 기분이 들 정도야. 어찌 보면 아킬레우스와 비슷하지. 발이 빠르고, 맞아도 별로 다치질 않으니까. 난 오로지 우리의 편지가 자아낸 이 실재하지 않는 공간에서만 약해지는 느낌이 들어.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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