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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것들의 힘
에밀리 스피백 지음, 이주혜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원제는 Worn Stories. 낡은 옷에 깃든 저마다의 기억에 대한 모음집이다. 사실 마이라 칼만(의 이야기만)을 읽으려고 집어든 책이고 실제로 해당 사연들을 전부 읽지는 않았다. 낡은 옷뿐만이 아니라 대체로 모든 사물에는 누군가의 기억이 깃들어 있게 마련이다. 말없는 사물들은 생각보다 많은 말을 조용히 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이 이야기들은 바로 포착해내지 않으면 스르르 사라지고만다.˝고. 정말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문장은, 낡은 옷에 대한 이 책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도 매우 필요한 문장인 것 같다. 서둘러 포착해내지 않으면 모든 것은 스르르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다. 순간은, 시간에 대한 부식성이 너무도 강하니까. 순간은 혹은 순간에 대한 기억이라는 것은 만들어지는 동시에 소멸하고 있다. 서서히 하지만 눈깜짝할 사이에 진행되는 이러한 소멸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쓰기writing인 것인지도. 담담하고 절박하게.
˝어쩌다가 이 옷을 입은 채로 집에 가면 아내 케이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당신 셔츠와 바지에도 녹색 먼지가 묻어나.˝ 지금도 이 재킷을 입으면 다른 옷에 먼지가 묻어난다. 괴짜처럼 들리겠지만 이럴 때면 왠지 한때 그 옷을 입었던 사람의 일부분이 내게 묻어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사실 생각해보면 읽기라는 것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누군가의 글을 읽는다는 건 그 사람의 먼지 묻은 낡은 옷을 입어보는 행위인지도. 그러면 글이라는 낡은 옷을 통해 그 사람의 일부분이 내게 묻어날 것이다. 독서. 저자가 입고 있던 낡은 옷을 입고 그 사람의 일부분을 나에게 묻히기)
덧, 루이즈 부르주아의 서문이 좋다.(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루이즈 부르주아와 마찬가지로 도무지 옷을 버릴 줄 모르기 때문이다. 20년도 더 된 옷을 입고 환하게 웃는 그 사람의 모습을 여전히 사랑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는 이 책에 대한 쓰기는 아님. 사물과 기억에 대한 문장들을 적어둔다)
1. 어떤 음악을 들으면, 그 곡을 제게 처음 알려준 사람이 생각나요. 그것도 번번이요. 처음 가본 길, 처음 읽은 책도 마찬가지고요. 세상에 그런 게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떠올라요. ‘이름을 알려준 사람의 이름‘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건 사물에 영원히 달라붙어버리는 것 같아요. 김애란, 「너의 여름은 어떠니」
2. 작은 보물이란 나 여기 있다라고 적힌 것들이야. 그것보다 조금 큰 보물은 아직 기억나니라고 적힌 것들이고. 그러나 무엇보다 큰 보물은 나 거기 있었다라고 적힌 것들이지. 헤르타 뮐러, 『숨그네』
3. 붕괴된 시간과 공간을 기억하면서 현존하는 사물들이 여기에 있다. 최다정, 『한자줍기』
4. 기억이라는 건 없고, 그저 남겨진 물건들만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죄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 세라 망구소, 『300개의 단상』
5. 기억들은 그 침대의 비좁음에, 그 방의 협소함에, 너무 강했고 너무 차가웠던 그 모닝 티의 사라지지 않는 신맛에 달라붙어 있다. 페렉, 『공간의 종류들』
6. (아마도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유진목의 『연애의 책』은 사물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이다. 연애의 끝, 그리고 이후에 남겨진 방에 대한.
˝당신이 죽고 난 뒤로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거기에는 당신의 물건들이 놓여 있다
(....)
어떤 것은 끝내 찾지 못해서
방에 앉아 울었다
내가 죽고 난 뒤로
방은 완전히 비어 있다
이 책은 돌아와 마저 쓰인 것이다˝
(유진목, 『연애의 책』 시인의 말)
˝그 방에 오래 있다 왔다
...
어떻게 적을까요
...
갓 지은 창문에 김이 서리도록 사랑하는 일을˝
(유진목, 「잠복」)
누군가와 사랑하는 일은 새로운 방을 짓는 일일까. 방에 조금씩 가구들이 들어찬다.
이것 봐 발 디딜 틈이 없어 그리고,
문득 텅 빈 방을 마주하는 어느 날
7. 스스로는 어떤 기억의 능력도 갖지 않은 수많은 장소와 물건 속에 달라붙어 있는 이야기들은 이전에 그 누구에 의해서도 말해진 바도, 기록된 바도, 전해진 바도 없었다. 제발트, 『아우스터리츠』
8. 고통은 수시로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 연관되고, 그래서 그들은 여행의 필요성을 느끼는데, 그것은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다. 데이비드 실즈,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9. 물에 가라앉은 물건에 달라붙은 젖은 해초와도 같이 온갖 기억들의 뒤엉킨 타래가 떠오른다. 릴케, 『말테의 수기』
10. 한 사람의 삶을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분명하게, 그리고 가장 감동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은 소지품이다. 물건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는 우리의 중요한 일부다. 나는 물건을 갖고 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시몬 드 보부아르는 『편안한 죽음』에서 어머니의 마지막 나날들을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물건의 힘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 물건들 속에는 생이 응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생의 그 어느 순간보다 바로 이 순간 더욱 분명하게. 탁자 위에 놓인 물건들은 버림받고 무용한 존재가 되어 쓰레기가 되거나 새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
신발을 신으면 발이 온전히 그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신발에는 그 주인의 본질이 축적되어 남아 있다. 론 마라스코, 브라이언 셔프, 『슬픔의 위안』
11. 그리하여 집안의 물건 하나하나는 그의 <그림자>를 악몽 속의 환각이 아닌, 그 기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그 추억에 다시 한번 생명을 주는 일종의 유령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커다란 사물 하나하나에는 몽환적인 개성이 있다. 바슐라르, 『촛불의 미학』
12.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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