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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 - 건축가 조한의 서울 탐구
조한 지음 / 돌베개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사람은 변하지만 추억은 변하지 않고,
건물은 고쳐지더라도 그 속의 이야기를 버리지 않는다
간혹 너무나도 빠르게 변해가는 서울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뉘엿뉘엿 해가 질 무렵 매일 서교동을 기점으로 광화문, 종로, 혜화동을 거쳐 우리집이 있는 삼선동까지 오는 273 버스를 탄다. 어제만 해도 발견하지 못했던 새 건물이 들어선 자리를 발견하고는 생경함을 느낀다. 구옥을 허물고 신축 건물이 들어서는 일이야 서울에선 종종 있는 일이기에 이제 이런 어색함이 낯설지 않을 만도 한데, 기억을 더듬어 그 자리에 어떤 건물이 있었는지 떠올려보려 하면 잘 생각나지 않는다. 이때만큼은 꽤 오랫동안 살아온 서울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낯설다. 이곳에 산 지 16년이 되었지만, 시도때도없이 솟아나는 신축 건물들 때문에 가끔은 길을 잃고 헤매는 스스로를 보면 더욱 그렇다.
'건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내게 익숙한 거리와 건물들은 주로 나에게 이정표의 역할을 한다. 가령 인사동에서 만날 약속을 잡는다면 주로 장소는 인사동 한가운데에 있는 '쌈지길'로 정한다. 신사동에서 만난다면 '가로수길 입구'가 딱이다. 가끔은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서 만나 종로를 지나 대학로까지 무작정 걸어보기도 한다. 이 세 장소의 공통점은 '왠지 변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열린 공간'이라는 점이다. 사실 책에도 등장하는 종로의 세운상가라던지, 낙운상가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삶도 수차례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예전의 붐비던 모습을 찾을 수 없이 덩그러니 남은 가게들이 버티고 있는 모습을 보면, 신축 상가들의 세련된 겉모습과 머천다이징에 비교해 역시나 조금은 촌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건물 자체가 오래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저절로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던 옛 영화를 떠올리게 되니, 자연스레 큰 변화 없이 상대적으로 뒤쳐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건물들이 갖는 존재감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데, 사람들은 아마도 오랜 시간 한 자리에서 흥망성쇠를 거친 건물에게 일종의 애정을 갖게 되는 듯 하다. 그것은 비록 생물이 아니더라도 같이 부대끼며 같은 시대를 겪어낸 흙과 돌과 벽에 대한 애착이며 지켜내야 한다는 책임감이다. 요즘 서울에는 소위 '핫플레이스'가 넘쳐나지만, 그 어떤 곳에도 세운상가, 낙원상가 같은 묵직한 존재감은 없다. 오래된 건물만이 갖고 있는 힘은 과거의 그 지점에서 걷고 있던 나를 떠올리게 하는데에 기인한다.
오래된 건물 안을 걸을 때, 지금의 나와 과거의 나가 겹쳐지는 상상을 해 보자. 구조가 조금 바뀌었더라도, 사람들이 달라졌더라도 천천히 발을 옮기며 옛 기억을 더듬다 보면 추억 어린 귀퉁이들이 어른이 된 나를 반긴다. 사람은 변하지만 추억은 변하지 않고, 건물은 고쳐지더라도 그 속의 이야기를 버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