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시대의 여행자들
줄리아 보이드 지음, 이종인 옮김 / 페이퍼로드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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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나치가 벌인 만행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전혀 새로운 충격과 몰입감을 주었다.



그 때 당시의 바로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이 들려주는 목격담들은 그 자체로 영상이 

담지못하는당시 현장의 분위기를 전해주는 훌륭한 기록문학인데, 특히 어째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나치의 유례없는 억압 정책에도 일반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를 열광적으로 지지하였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책을 통해 알게 된 가장 놀라웠던 점은, 이미 1차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이라는 

과오를 가졌음에도 독일은 내내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는 점이었다.



유럽과 미국의 식자층들은 독일이 배출했고 유럽문명에 이바지했던 위대한 예술가와 철학자들,

아름다운 자연, 향수를 부르는 고즈넉한 중세풍의 마을에 더해 독일인들의 근면함과 소박함 등

그야말로 독일의 모든 것들을 사랑했고 그 것들을 향유하고자 했는데 마침 1차세계대전 후의 

경제난으로 독일 마르크화의 환율이 '아주 좋은 조건'이기도 했기에 수많은 유럽인들이 

독일을 여행하고 자식들을 유학보내기까지 했다.



독일에 대한 이런 선망과 애정은 히틀러와 나치에 경계심을 가진 사람들조차 인정할 정도로 

사회 전반에 퍼져있었기 때문에 독일을 방문한 많은 유럽인들은 1933년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한 즉시부터 시작된 군국주의체제로의 전환과정의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었음에도 

독일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를 내릴 수가 없었는데 심지어 일부는 히틀러가 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후에도 끝까지 독일에 대한 평가를 바꾸지 않으려 할 정도였다.



그들은 그저 독일의 훌륭한 정신문화와 독일인들의 높은 의식수준이 결국 나치의 광기에 

제동을 걸 것이고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히틀러도 차분하게 유화정책을 펼 것이라는 

낙관으로만 독일을 바라볼 뿐이었다.



물론 이런 망상에 가까운 희망만이 히틀러의 횡포를 눈감아주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히틀러가 주장한 인종차별의 기반이 된 우생학은 영국과 미국을 위시한 당대 유럽인들에게 

널리 지지받던 이론이었으며 특히 유대인에 대한 반감과 차별적 선입견 역시 

당시 유럽인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던 것들 이었기에 히틀러의 아리아인 우월주의와 

유대인차별에 대해 대다수의 교양인들 조차 '대놓고 지지하지는 않지만 뭐라 판단할 수 없다'

는 입장을 보였고 히틀러와 나치가 독일국민들의 삶 깊숙한 곳까지 강요한 엄격한 통제는

그에 속할 필요가 없던 외국인들에겐 '높은 고용율과 안정된 사회 질서'로만 보였기 때문에 

그들은 국가사회주의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일부는 자신이 속한 사회가 지향해야 할 

장점들이라고 찬양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오스트리아가 강제 합병되었을 당시에도 오스트리아의 일반 국민들중 일부는 

이제 히틀러의 나치 덕분에 오스트리아도 독일처럼 실업률이 줄고 경제상황이 호전되어 

삶이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에 기뻐하기도 했다)




히틀러가 총통에 오른지 87년이 지난 현재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모든 희망어린 판단들이 

결국 집단적인 확증편향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과연 나는 저들을 우매하다고 

질타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5~6년 전 우리나라에 느닷없이 중국열풍이 불었다. 대표적인 지상파방송이자 공영방송인 

KBS에서는 [슈퍼차이나] 라는 방송을 통해 중국의 눈부신 경제성장과 엄창난 포부 등을 

자세히 보도하며 중국이 미국과 패권을 다투는 초강대국이 될 것이라고 했고 도올교수는 

방송에서 중국의 지도자 시진핑이 청렴결백의 표본이라고 찬양했다.


경제전문가들 역시 이제 중국에 관심을 가져야 하면 중국의 '일대일로' 계획에 참여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들 중 누구도 중국의 심각한 인권침해와 공산당의 일당독재 체제의 

불안정성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재미있게도 당시 중국의 찬양하던 많은 사람들 또한 중국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들에 대해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중국도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게 될 거라고 말해왔다는 것이다. 

경제성장은 중국인들의 물질적 삶을 풍요롭게 할 거고 그럼 자연스럽게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커져 공산당도 어쩔 수 없이 물러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나 역시 중국에 대한 찬양을 곧이곧대로 믿어 중국 주식에 투자를 했고 그 후 중국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이 5~6년 동안 내가 지켜본 중국은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눈부신 경제성장은 조작과 압제로 쥐어짠 기만이었으며 민주화에 대해 중국 공산당은 

최근 홍콩 시민들에 대한 폭압과 학살로 답변을 대신했다. 거기에 2021년 시진핑의 임기는 

최장 2032년까지로 연장되어 사실상의 종신집권체제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현재 중국은 

대만과 전쟁분위기를 조성하며 주변국민들에게 염려와 불안감을 심어주고 있다.



이 책을 통해 평범한 개인이 진단할 수 있는 대상의 범주가 얼마나 좁은지, 

확증편향의 유혹이 가져오는 결과가 삶에 얼마나 큰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는지, 

그리고 정확한 판단은 정확한 근거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다시 깨달았다.



아주 평범한 결론이지만 위에 언급한 내 개인적인 경험이 더해져 평생 잊지 않을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책이 가진 또 하나의 장점은 '몰입감'이다.


히틀러의 집권부터 독일의 패망까지 제3제국의 흥망과 함께 연대순으로 담긴 목격담 속의 

분위기도 기쁨과 희망, 불안과 초조, 그리고 탄식과 절망으로 점차 변해하는데 이 과정이 

주는 생동감과 현장감이 뇌리에 깊이 박혀 600페이지가 길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다.



다만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 속의 목격담들은 말그대로 외부인인 여행객들의 

시선이기에 그들이 묘사하는 당시 독일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의 독일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독일인의 목격담도 함께 읽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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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로드 - 유라시아의 가장 북쪽길
윤성학 지음 / K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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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로드]


제목이 주는 생경함에 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거시역사의 장구한 흐름 속에서 실크로드나 초원길(스텝로드)이 보여준 그 거대한 존재감과 

웅장한 서사들을 떠올리며 기대감이 부풀기도 했다.


허나 책을 다 읽은 후엔 오직 한가지 생각만 머리속에 가득하다.


이 길을 과연  '모피로드'라고 불러도 되는 것일까?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사는 그 목적과 과정이 스페인의 아메리카대륙 정복과 데칼코마니처럼 닮아있는데, 결국 모피를 얻기 위한 약탈과 살육의 연대기이며 시베리아 원주민에 대한 침탈과 식민화의 역사이다.


러시아에게 시베리아는 모피라는 고부가가치 재화를 거저 얻을 수 있는 그야말로 화수분 그 자체였는데, 그 땅에 살고 있던 120여개 부족 20여만명의 원주민들은 여전히 동물 뼈와 석기를 사용하는 미개한 노예들일 뿐이었고 이런 원주민들에게는 회유를 위한 가식과 위선의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기에 러시아는 폭력이 가진 효율성에 아무런 망설임없이 기댈 수 있었다.


이 자비없는 폭력은 결국 그 것이 수반하는 파괴의 비효율성이 효율성을 넘어서는 수준에 이르러서야 통제 되기 시작했으나 시베리아 원주민의 운명은 모피를 위해 피부가죽이 벗겨진 채 씨가 마른 검은 담비나 북극여우, 해달 등의 동물들처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떨어져버렸다.  


이런 참담한 역사를 품고있는, 피웅덩이와 뼈무더기로 이루어진 그 길을 그저 '모피로드'라는 이름으로 불러도 되는 것일까? 양방향의 교역로가 아닌 그저 일방향의 약탈로였던 길을 말이다.


만약 우리가 임진왜란전쟁에서 왜에게 정복당했다면 이 또한 일본이 고부가가치 상품이자 위신재인 도자기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개척한 '세라믹 로드'라 불리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착잡해진다. 


모피로드라는 이름은 학계에서 명명법에 따라 지은 가치중립적 명칭이겠지만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수탈과 폭압의 역사가 전혀 느껴지지 않기에 의도 되었건 그렇지 않건 결과적으로 제국주의가 자행했던 가장 거대한 규모의 범죄가 은폐 되었다고 생각한다. 양자간 우열이 모든 것에 우선했던 지난세기의 과오를 딛고 이제 호혜의 미덕을 최선의 가치로 추구하는 21세기 지성의 흐름에 맞게 모피로드라는 이름도 다시 명명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모피로드의 역사에 대한 감상과 별개로, 저자는 이 모피로드가 대한민국의 국익에 미칠 이로운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21세기 러시아의 신 모피로드는 두 갈래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북극항로와 시베리아 횡단 철도이다. 러시아는 이 신 모피로드의 동쪽 끝에 닿아있는 아시아-태평양 경제권과 연계해 나날이 쇠퇴해가는 시베리아지역의 부흥과 러시아의 국제적 고립을 탈피하고자 하는 사정이 있으며 모피로드의 종착지에 위치한 우리나라도 이 길을 이용하면 유럽까지의 운송시간이 10여일 정도 단축된다. 허나 저자는 이 신 모피로드가 새로운 물류 네트워크의 한 축을 차지하기엔 아직 불안요소가 많은 점도 지적하며 다만 그 가능성까지 섣불리 경시하지는 말자는 정도의 소개로 마무리 하고 있다. 


책의 단점은 우선 다듬어 지지 않은 문장이 계속, 특히 책의 후반에 갈 수록 눈에 띄게 보인다는 점이다. 어느 책이든 오타나 매끄럽지 않은 문장이 있기 마련이지만 [모피로드]는 후반부로 갈 수록 다른 책에 비해 많이 보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또 표지에 좀 더 신경을 썼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요즘 출간된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책들도 '리커버 특별판'으로 재출간 될 정도로 커버 디자인이 독자들에게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있으며 나 역시 커버 디자인이나 책 제목의 폰트에 가장 먼저 눈길이 가곤 하는데

[모피로드]의 커버는 책이 담고 있는 가치를 보여주기에 빈약한 디자인이라 아쉽다. 좀 더 무게있는 표지였다면 어땠을까 싶다.



허나 책 [모피로드]가 담고 있는 내용들은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기에 숙독할 가치가 충분히 높다고 생각한다. 350페이지 정도의 적절한 분량에 시베리아의 역사는 물론 러시아와 한국의 접촉도 빠짐없이 담고 있다. 

 

책의 내용은 크게 1.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 2. 러시아와 한국 3. 신 모피로드와 한국 이 세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조선 효종때의 '나선정벌'로 기억하는 한국과 러시아와의 첫 조우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일어났는지, 그리고 조선말 고종과 민비가 의존했던 러시아제국의 입장은 어떠했는지 등에 대한 내용은 특히 굉장히 유익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에 대해 궁금한 사람들에게 추천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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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타라 납치사건
데이비드 I. 커처 지음, 허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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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들 정도로 몰입도 높은 시간이었다.

이 사건이 없었다면 여느 평범한 유대인 가족과 같은 삶을 살았을 모르타라 일가는

1858년 6월23일 해질녘의 노크 소리와 함께 구교와 신교, 유대인과 비 유대인,

교권과 세속권, 교황과 이탈리아 통일세력 등 당시 세계를 양분하고 있던 두 세력의 전장

한 가운데로 끌려나오게 되었고 빼앗긴 아들을 되찾고자 하는 부모의 애끓는 마음은

19세기의 대격동에 휩쓸려 표류한 채 잊혀져 갔다.

그 전부터 비슷한 일이 늘상 일어났던, 그래서 당시엔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 아주 사소한

일이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계기가 되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그런 사건은 수 많은 역사가들에게 분석되고 평가되어 그에 합당한 '의의'를 부여받지만 그런 거시적 스케일의 관점 아래

실제 그 사건을 겪은 당사자들의 삶과 심정은 조명받지 못하고 잊혀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의 가장 유익한 점은 역사에 대한 인식 자체를 환기시켜준 다는 점이다.

사회인류학을 전공한 저자의 미시적 접근법 덕분에 우리는 중세와 근대라는

시대의 대전환기, 그 격렬했던 한 시기의 포문을 연 모르타라 납치사건을 주류인

이탈리아사나 가톨릭사, 혹은 유대민족사가 아닌 19세기를 살았던, 아니 19세기까지

살아왔던 유대인 일가족의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일가족의 고된 행보를 좇다보면 그 간의 거시적인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도

느낄 수도 없던 생생한 삶을 목도하게 된다. 19세기 중반까지도 유대인들이 그들의

거주구역인 '게토'에서 사실상 감금된 채 살아야 했으며 유대인 아이에게 세례를

주기만 하면 그 아이를 강제로 데려다 가톨릭 교도로 살 게 해도 괜찮다는 교회법이

살아있었다는 사실, 당시에도 이미 정치세력이 자신들의 입지를 넓히기 위한

여론전을 구사했고 당시에도 언론은 자기편의 이익을 위해 비방과 날조,

허위사실 유포를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노련함을 보였다는 사실 등은 이 책이

던져주는 수많은 논제들과 함께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생각거리들을 제공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역사들 - 최상류층의 삶, 정치 지도자들의 국정과

국가간 외교의 저변에 깔린 책략 - 이 아닌, 그 시대의 땅 위를 살았던 소시민들의

생생한 삶이 주는 여운에 '내러티브 역사'에 대한 강한 관심이 생겼다.

우선은 저자가 후기에서 그 자신이 가장 큰 영감을 얻었다고 소개한

[마르탱 게르의 귀환] 부터 읽어보고 [고양이 대학살]이라는 명저도

찾아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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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 세기의 핵담판 쿠바 미사일 위기의 13일 마이클 돕스의 냉전 3부작
마이클 돕스 지음, 박수민 옮김 / 모던아카이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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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의 '쿠바 미사일 위기'를 다룬 연구와 책들은 이미 충분할 정도로 많지만,
대부분은 J.F.케네디의 리더십을 평가하거나 '게임이론'의 현실예시 정도로만 
분석하는 관점을 취하고 있기에 우리는 이 13여일의 시간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했던 순간'임을 망각하곤 한다. 

이런 느슨한 시선의 저변에 깔려있는 '핵 억제력' - 핵전쟁의 예상가능한 유일한
결말은 공멸뿐이기에 핵보유국끼리는 절대 전쟁을 벌일 수 없다는 - 에 대한 신뢰는 
지극히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정말로 쿠바 사태의 평화적 결말은 그저 예정된 수순이었을까?

저자 마이클 돕스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한다. 
쿠바 미사일 사태는 정말로 전쟁 일보 직전의 상황까지 치달았으며 
미국과 소련은 진지하게 핵무기 사용을 고려했다. 
당시 미 국방부 장관이던 로버트 맥나마라가 훗날 쿠바에서 핵전쟁이 벌어지지 
않은 이유는 단지 '운이 좋아서' 라고 말한데서 알 수 있듯 1962년 당시의 
상황은 결코 낙관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당시의 미국과 소련에겐 핵 억제력이 통하지 않았는가?
J.F.케네디와 니키타 흐루쇼프가 미치광이 전쟁광이라서?
아니면 전장이 쿠바라는 작은 섬 너머로 확산되게 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

마이클 돕스가 수집한 방대한 미공개 자료에 따르면 이 둘 모두 
아니었다. 케네디와 흐루쇼프는 20세기의 크고 작은 전쟁을 
경험한 전쟁세대였기에 전쟁의 무서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며
정상적인 인류애를 가진 사람들이었기에 쿠바 미사일 위기 내내 
평화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왔다.

흐루쇼프는 자신의 지위와 소련의 명예가 깎이는 위험을 감수하며 
케네디에게 협상의 의사를 먼저 내비쳤고 케네디 역시 "반대편 세계에 앉은 
두 사람이 인류 문명을 종식시킬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은 정상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며 전쟁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허나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 사고들은 두 사람의 의사와 관계없이
양측 지도부를 극단적 선택으로 몰아넣어갔고 선제공격계획이 수립되고
D-DAY가 설정되었으며 애당초 국지전은 고려조차 되지 않았다. 

군수뇌부들은 전쟁이 벌어질 경우 쿠바가 아닌 소련 전역은 물론
쿠바 사태에 직접 관여하고 있지 않은 중국 등의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까지
모조리 섬멸해야 한다는 보고를 올렸는데, 그 내용은 1077개 목표물을 대상으로 
핵무기 3423기를 쏟아부어 "완전하고 포괄적이며 흔적을 지워버리는" 
작전계획이었다. 이를 들은 케네디는 "그러고도 우리 자신을 인간이라고 
부르는군요." 라고 쏘아부쳤지만 소련의 핵미사일 하나가 미국 본토에 떨어질
경우 최소 사망인원이 60만명이라는 보고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처럼 케네디와 흐루쇼프가 얼마나 합리적인 지성과 도덕성을 소유했는지와는
관계없이 상황은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고 선택은 강요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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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돕스가 술회했듯 1962년 쿠바 미사일 사건은 이미 속속들이 연구되어 
더이상 새롭게 할 말이 없는 듯한 주제로 보였지만 그의 [1962]는 쿠바 사건을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쓴 명저라고 생각한다. 

한 두 문장으로 요약되는 고작 13여일의 사건의 이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관여하고 있었고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판단을 내렸는가, 그리고 이 것들이
역사를 어떻게 움직였는가는 그 자체로 한 편의 완벽한 소설을 보는 듯한
긴장감을 주고, 당시의 위기에 관여되어 있었던 소련, 미국 그리고 쿠바의 인물들이 
보이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결정적 순간' 앞에 선 역사적 인물 
역시 나약하고 불안한 평범한 인간에 불과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일깨워준다.


마지막으로 '핵 억제력'이 과연 우리가 믿는 만큼의 합리성을 갖고 있는가라는
불안한 의문을 남기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특수성을 생각할 때 
군 관계자 뿐만 아니라 일반시민들도 꼭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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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5 - 1931-1935 만주침공과 새로운 무장투쟁 (박시백의 일제강점기 역사만화) 35년 시리즈 5
박시백 지음 / 비아북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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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의 무단통치부터 1945년의 해방까지
그 다사다난하고 치열했던 우리 근대사 35년 중
이번 5권에서 다룬 내용은 극본으로 치면 위기를
지나 절정으로 향해가는 단계라 할 수 있다.

미국발 경제대공황이 식민자본주의의
허황한 빛을 휘청거리게 만드는 와중에
스탈린의 소련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비록 그 과정에서
1천만명에 이르는 농민들의 희생이 있었지만 )
공산주의자들의 열광을 끌어냈고,
한편 일제는 대공황의 혼란을 타개하기 위해
만주를 기습점령하는 전쟁을 벌였다.

국내의 항일투쟁이 점차 어려워짐에 따라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피신했던 독립열사들에겐
일제의 만주침략과 만주국 수립은 절체절명의
위기였지만 이제 남의 일이 아니게 된 중국과
힘을 합칠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허나 이미 무단통치로부터 2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면서 일제의 조선강제병합을 되돌릴 수 없는
현실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고
민족의 틀을 버리고 공산주의라는 사상을
중심으로 판을 새로 세워야 한다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또는 투쟁의 방법에 대해서도 큰 이견이 생겼다.

20여년 간이나 각자도생의 처절한 길을 걸어오며
붙잡아왔던 이들의 다양한 가치관이
반일투쟁의 기치 아래 하나로 응집되기엔
당면한 정황이 너무나 급박했기에 여러 번의
통합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이처럼 반일 독립의 길이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와중에도 일제는 점차 힘을 강화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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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본 후 우선 반성의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역사책 보는 것이 취미라 말하고 다닌 나이지만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근현대사는 기껏 교과서-수험서에
정리된 무미건조한 연혁표 수준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35년> 1권을 보았을 때부터 느꼈지만 권 수가
늘어갈 수록 정말이지 근현대사에 대해 내가 얼마나
무지했었는지 알게 되어 더없이 민망하다.

이미 박시백의 <35년>은 너무 많은 사건들과
너무 많은 인물들 때문에 근대사에 높은 진입장벽(?)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최고의 입문서라는 찬사를 받고 있지만,
사실은 교과서에서 배운 근현대사지식만 갖고 있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도 최고의 개론서가 아닐까싶다.

박시백의 <35년>은 정말 칭찬할 부분이 많은데
우선 책의 구성이다. 프롤로그로 당시의 세계정세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본문 뒤에 수록된
연표,인명사전, 사료읽기도 굉장히 정리가 잘 되어 있다.
전체 300페이지 중 20%인 60페이지를 차지하는 이 부록들은
박시백의 <35년>이 그저 역사를 만화로 쉽게 설명하려는
목적만이 아니라 당시를 살았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을
발굴해 재조명하고 35년을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의 결실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어 실제로는 부록이 아니라
모두 본문으로 포함해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또 만화 자체의 재미도 충분하다.
<먼나라 이웃나라>의 히트 이 후 만화로 된 인문서가
많이 나왔지만 대부분은 매력적이지 않은 그림체와 컷 구성,
내용의 빈약함 등 때문에 오히려 가독성이 떨어지는 졸작들이었다.
허나 박시백의 <35년>은 만화 자체의 수준도 상당히 재미있고
그림체에 모에화(;;)도 없고 만화 특유의 과장도 없이
간결하기 떄문에 호불호가 갈리지 않는 점도 좋다.



5권 자체의 내용에 대해 좋았던 점은
우선 이봉창 윤봉길 그리고 최근 대한민국의
뜨거운 감자였던 약산 김원봉, 그리고 김일성이
등장을 했다는 점이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는
역시 그 짧은 분량에도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그에 대한 기록들이 사료읽기에 등장해서 좋았다.

김원봉과 김일성에 대해선 집중해서 읽었는데
아직은 분량이 적어 다음 권을 더 보아야겠지만
그들이 처음 등장했다는 점에서 5권이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

김구는 나왔지만 분량이 적고 (백범일지 때문인지
항일투쟁의 역사에선 왠지 김구가 주인공 같다)
이승만은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점이 아쉬웠는데
결국 6권과 7권에서 이들의 활약이 주가 될 테니
다음권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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