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시대의 여행자들
줄리아 보이드 지음, 이종인 옮김 / 페이퍼로드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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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나치가 벌인 만행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책에 담긴 이야기들은 전혀 새로운 충격과 몰입감을 주었다.



그 때 당시의 바로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이 들려주는 목격담들은 그 자체로 영상이 

담지못하는당시 현장의 분위기를 전해주는 훌륭한 기록문학인데, 특히 어째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나치의 유례없는 억압 정책에도 일반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를 열광적으로 지지하였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책을 통해 알게 된 가장 놀라웠던 점은, 이미 1차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이라는 

과오를 가졌음에도 독일은 내내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는 점이었다.



유럽과 미국의 식자층들은 독일이 배출했고 유럽문명에 이바지했던 위대한 예술가와 철학자들,

아름다운 자연, 향수를 부르는 고즈넉한 중세풍의 마을에 더해 독일인들의 근면함과 소박함 등

그야말로 독일의 모든 것들을 사랑했고 그 것들을 향유하고자 했는데 마침 1차세계대전 후의 

경제난으로 독일 마르크화의 환율이 '아주 좋은 조건'이기도 했기에 수많은 유럽인들이 

독일을 여행하고 자식들을 유학보내기까지 했다.



독일에 대한 이런 선망과 애정은 히틀러와 나치에 경계심을 가진 사람들조차 인정할 정도로 

사회 전반에 퍼져있었기 때문에 독일을 방문한 많은 유럽인들은 1933년 히틀러가 수상에 

취임한 즉시부터 시작된 군국주의체제로의 전환과정의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었음에도 

독일에 대해 냉정하게 평가를 내릴 수가 없었는데 심지어 일부는 히틀러가 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후에도 끝까지 독일에 대한 평가를 바꾸지 않으려 할 정도였다.



그들은 그저 독일의 훌륭한 정신문화와 독일인들의 높은 의식수준이 결국 나치의 광기에 

제동을 걸 것이고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히틀러도 차분하게 유화정책을 펼 것이라는 

낙관으로만 독일을 바라볼 뿐이었다.



물론 이런 망상에 가까운 희망만이 히틀러의 횡포를 눈감아주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히틀러가 주장한 인종차별의 기반이 된 우생학은 영국과 미국을 위시한 당대 유럽인들에게 

널리 지지받던 이론이었으며 특히 유대인에 대한 반감과 차별적 선입견 역시 

당시 유럽인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던 것들 이었기에 히틀러의 아리아인 우월주의와 

유대인차별에 대해 대다수의 교양인들 조차 '대놓고 지지하지는 않지만 뭐라 판단할 수 없다'

는 입장을 보였고 히틀러와 나치가 독일국민들의 삶 깊숙한 곳까지 강요한 엄격한 통제는

그에 속할 필요가 없던 외국인들에겐 '높은 고용율과 안정된 사회 질서'로만 보였기 때문에 

그들은 국가사회주의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일부는 자신이 속한 사회가 지향해야 할 

장점들이라고 찬양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오스트리아가 강제 합병되었을 당시에도 오스트리아의 일반 국민들중 일부는 

이제 히틀러의 나치 덕분에 오스트리아도 독일처럼 실업률이 줄고 경제상황이 호전되어 

삶이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에 기뻐하기도 했다)




히틀러가 총통에 오른지 87년이 지난 현재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모든 희망어린 판단들이 

결국 집단적인 확증편향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과연 나는 저들을 우매하다고 

질타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5~6년 전 우리나라에 느닷없이 중국열풍이 불었다. 대표적인 지상파방송이자 공영방송인 

KBS에서는 [슈퍼차이나] 라는 방송을 통해 중국의 눈부신 경제성장과 엄창난 포부 등을 

자세히 보도하며 중국이 미국과 패권을 다투는 초강대국이 될 것이라고 했고 도올교수는 

방송에서 중국의 지도자 시진핑이 청렴결백의 표본이라고 찬양했다.


경제전문가들 역시 이제 중국에 관심을 가져야 하면 중국의 '일대일로' 계획에 참여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들 중 누구도 중국의 심각한 인권침해와 공산당의 일당독재 체제의 

불안정성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재미있게도 당시 중국의 찬양하던 많은 사람들 또한 중국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들에 대해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중국도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게 될 거라고 말해왔다는 것이다. 

경제성장은 중국인들의 물질적 삶을 풍요롭게 할 거고 그럼 자연스럽게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커져 공산당도 어쩔 수 없이 물러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나 역시 중국에 대한 찬양을 곧이곧대로 믿어 중국 주식에 투자를 했고 그 후 중국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이 5~6년 동안 내가 지켜본 중국은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눈부신 경제성장은 조작과 압제로 쥐어짠 기만이었으며 민주화에 대해 중국 공산당은 

최근 홍콩 시민들에 대한 폭압과 학살로 답변을 대신했다. 거기에 2021년 시진핑의 임기는 

최장 2032년까지로 연장되어 사실상의 종신집권체제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현재 중국은 

대만과 전쟁분위기를 조성하며 주변국민들에게 염려와 불안감을 심어주고 있다.



이 책을 통해 평범한 개인이 진단할 수 있는 대상의 범주가 얼마나 좁은지, 

확증편향의 유혹이 가져오는 결과가 삶에 얼마나 큰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는지, 

그리고 정확한 판단은 정확한 근거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다시 깨달았다.



아주 평범한 결론이지만 위에 언급한 내 개인적인 경험이 더해져 평생 잊지 않을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책이 가진 또 하나의 장점은 '몰입감'이다.


히틀러의 집권부터 독일의 패망까지 제3제국의 흥망과 함께 연대순으로 담긴 목격담 속의 

분위기도 기쁨과 희망, 불안과 초조, 그리고 탄식과 절망으로 점차 변해하는데 이 과정이 

주는 생동감과 현장감이 뇌리에 깊이 박혀 600페이지가 길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다.



다만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 속의 목격담들은 말그대로 외부인인 여행객들의 

시선이기에 그들이 묘사하는 당시 독일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의 독일은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독일인의 목격담도 함께 읽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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