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전 - 제3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함윤이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3월
평점 :
나에게 소설 인물과 서사 빼면 아무 재미가 남지 않는다. 이 책은 초반에 정전 능력이 있는 인물을 내세우고는, 주인공의 서사를 빠르게 풀어내며 독자를 이야기에 동화시킨다. 씩씩한 스무 살 청년이 제법 열심히 경제활동을 해나가다가 점점 노조원/비정규직/외국인노동자 차별을 다루는 노동소설의 영역으로 접어드는 과정이 꽤나 재미있다. 어른들은 자기 일자리든, 가족이든, 돈이든, 동료든 뭔가 인생의 중요한 가치를 걸고 싸움을 이어나간다. 여기까지는 서사로 끌고 온다.
그러나 막은 너무 어리다. 그리고 이 아이는 돌아갈 곳이 있다. 일하면서 번 돈으로 학교에 복학하면 된다. 어른들이 어린아이에게 너도 뭔가 걸고 싸우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어른들은 매일 자신들의 싸움 현장에 와주는 막을 고마워하고 잘 대해주는데, 막은 그게 싫다. 싸움은 멋지게 하고 싶어서 나도 노조 하겠다고 외쳤지만, 막상 진짜 싸움을 보게 되니 힙하지 않고 구질구질해서 별로다. 40대 중년 남성 독자 입장에서는 정말... 짜증이 솟구치는 인물이다.
인물에 좀 짜증이 나서 서사로 위로받으려는 시도를 해본다. 소설 제목도 그렇고 첫 장면도 그렇고 대체 정전은 뭘 언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오? '이제 슬슬 그 정전 능력이 나올 때가 됐는데?' 하는 타이밍을 지나고 또 지나 소설의 중반부를 훨씬 더 지나야 '회사 미워! 정전시킬 거야!'라는 막의 생각을 통해 등장한다. 그런데 막을 좋아하는 은단의 캐릭터도 정말 음침해서 아무 매력이 없다. 그리고 이 마음을 끝까지 이용만 해 먹는 막을 보니 짜증이 배로 밀려온다.
이 철없는 스무 살 청년들은 철저히 의존적이다. 공장에서 탈출하면서 어른들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바로 체포되어 재물손괴로 형사처벌을 받고, 본인들이 끼치고 싶었을 피해액보다 더 큰 금액을 고스란히 손해배상 청구를 당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막은 "내가 책임지고 싶어서"라고 말하는데, 아가야... 니가 돈이 있니 빽이 있니 뭘 책임질 수 있겠니...
소설의 경계를 현실이 얼마나 건너와야 할까. 조금 더 노조 쪽으로 기울었다면 노동소설로, 정전 능력의 다양한 활용(좋아하는 여자 생각만 하면 전기를 끊어버릴 수 있는 거 말고)을 보여줬으면 판타지 히어로물로, 둘이 고난을 헤치며 로맨스가 싹텄다면 청춘물로 흘러갈 수도 있는 확장성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결말은... 스무 살 청년의 결정되지 않은 미래와 같은 것일까? 평론가들은 그런 불확실성과 애매함을 높이 샀을까? 역시나 내가 못 보는 다른 면이 있으니 문학상 대상 타고 그러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