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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8월
평점 :
이 책을 읽었을 때, 연말을 맞이하여 성시경의 콘서트에 다녀왔다. 나에게 그는 20년 전부터 ‘노래는 잘하는데 괜히 재수 없는’ 포지션을 담당해 왔다. 이제 그도 40대 중반, 술 잘 마시는 아저씨가 되었으니 재수 없음을 해제하고 처음으로 공연에 가보자는 결심이었다.
콘서트 현장에서 들은 그의 노래는 공기 비율을 잘 조절해야 맛있어지는 아이스크림의 비밀 레시피, 박진영이 그렇게도 부르짖던 공기 반 소리 반 이론처럼, 호흡을 노래에 얼마나 적절하게 싣는지에 따라 그 감정과 떨림, 심지어 음정과 박자까지 최적점을 맞출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의 호흡은 그의 집중도에 따라 적절하기도 부족하기도 과하기도 했다.
노래는 어렵고, 나이는 먹었고, 그동안 쌓아온 술담배가 깎아온 체력에, 360도 회전무대, 계속 말썽인 인이어까지, 모든 노래들이 최고와 최악과 중간을 마구 널뛰기했다. 실망스러웠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미안함이나 몇 시간의 지난한 예매대기 후 가까스로 표를 구해서 모인 관객들에 대한 미안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냥 노래 잘하는 엔터테이너의 연말 디너쇼를 깔깔거리며 보는 시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같이 간 아내가 즐겁게 보고 듣고 웃었으니 그걸로 됐다.
최은영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이야기를 쓰려고 살짝 꺼낸 공연 이야기가 이렇게 길 필요는 없었는데… 어쨌든 요는,
작가는 완벽한 호흡으로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이야기의 구성도, 인물의 감정도, 배경 묘사도, 이야기의 속도와 분량까지 모두 완벽하다.
책을 정독하기보다는 속독하는 데에 익숙한 나라는 독자는 그래서 복잡하거나 어려운 책은 끝까지 잘 읽지 못한다. 얼른 지금의 책을 끝내고 다음 책을 읽고 싶어서. 그런데 어떤 책은 오랫동안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평소보다 느린 템포로 단락에, 문장에, 단어 하나하나에 집중해서 읽다 보면 비로소 이 이야기가 마음속에 스며들면서 독서의 충만한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번잡스러웠던 연말 성시경의 콘서트보다 더 따뜻하고 즐거웠던 최은영의 소설들. 모든 이야기들의 마지막 문단에서 느낀 따뜻함은 따로 스크랩해놔야지.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공부하는 사람이 된 주인공과 그녀의 멘토 이야기. 용산참사와 같이 가혹한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아주 작은 빛으로라도 밝혀서 나아가고자 한다.
<몫> 대학 시절 글을 읽고/말하고/쓰는 것에서 나아가 직접 활동에 참여하게 되는 친구. 저물어간 그녀의 몫과 남은 사람들의 몫.
<일 년> 이제는 말할 수 있는 8년 전 나눈 진심. 카풀로 시작된 그 따뜻함이 사라진 것 같지만 여전히 남아있다.
<답신> 이 이야기를 읽고 아프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서로를 지키기 위한 자매의 사랑. 개새끼인 형부에게 통렬한 헤드락을 거는 동생의 마음과 다가오지 말라고 고개를 젓는 언니의 마음이 너무 아프다.
<파종> 15살 많은 오빠의 내리사랑은 여동생과 조카, 모녀 모두의 마음에 따뜻함의 씨앗을 뿌려놨다.
<이모에게> 주인공에게 엄마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 이모. 이모의 말년에 이모를 돌보면서 얼마나 이모를 사랑하는지 알게 된다.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비록 버림받으며 시작된 삶이지만 그 끝마저 버림받고 싶지 않은 엄마 이야기. 너무 다정한 건 정말 나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