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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뱅이 언덕 - 권정생 산문집
권정생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평점 :
어린 시절 내가 읽은 동화나 고전소설의 주제는 대부분 권선징악을 기본으로 했던 듯싶다. 선악의 대립 구조가 없어도, 작은 생명까지 소중하게 여기고 하찮은 것들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따뜻한 마음씨가 항상 감돌았다. 동화는 이렇게 진정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서로를 헐뜯고 해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가련한 이웃들과 공존하는 삶을 지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이들에게는 참된 마음을 길러주고, 어른들에게는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게 해주는 따뜻한 문학이다. 그 중에서도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동화는 단연 <강아지똥>이다. 잠시 여담을 하자면, 어렸을 때만 동화를 읽었던 나는 이 <강아지똥>의 지은이가 누구인지 최근까지도 잘 몰랐다. 올해 출간된 <빌뱅이 언덕>이라는 책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권정생 작가를 알게 된 것이다. 권정생 작가의 이력을 통해 동화 <강아지똥>과 소년소설 <몽실언니>가 같은 작가의 작품이였다는 사실도 뒤늦게나마 깨달았다. 내가 좋아했던 '언니 이야기'가 권정생 작가의 <몽실 언니>인지 공지영 작가의 <봉순이 언니>인지 잠시 헷갈렸지만, 내가 진짜 기억하고 있는 '언니 이야기'는 권정생 작가의 <몽실 언니>라는 것을 책 표지를 보자마자 단번에 기억해냈다. <강아지똥>과 <몽실언니>를 같이 놓고 보자니 권정생 작가의 시선이 닿는 곳을 고스란히 그려볼 수 있었다. <강아지똥>도, <몽실언니>도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을 그려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권정생 작가의 산문집인 <빌뱅이 언덕>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그래도 차이점이 있다면, <빌뱅이 언덕>에는 가공의 인물이 아닌 권정생 작가와 작가 주변에 있는 실존 인물들의 삶이 두드러져 있다는 것이다. 빌뱅이 언덕은 권정생 작가가 2007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25년 가까이 몸을 비볐던 두 칸의 오두막집이 위치한 언덕이다. <몽실 언니> 계약금으로 40대 중반에 난생 처음 작가만의 공간을 마련한 것이라 한다. 그는 어릴 적 두 번의 전쟁을 겪으며 필연적으로 지독한 가난과 폐결핵이라는 질병의 짐을 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제 2차 세계대전과 6.25 전쟁은 피붙이와의 이별을 강요했고, 동네 친구들이 결핵으로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게 했고, 가난과 조그만 이익 때문에 잠시 양심을 잊어 버리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어려운 삶 속에서도 물질에 현혹되지 않고 가장 작은 것, 가장 낮은 곳을 바라볼 줄 알았던 작가의 삶은 의연하고 고결했다. 돈이 없어 기도원에 들어가지 못하는 문둥이 청년에게 자신에게도 아주 귀한 돈을 선뜻 건네주며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을 사랑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직접 실천했다. 가난은 떳떳하다는 그의 말이 물질문명에 찌들은 우리의 불행한 삶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한다.
더 이상 무엇을 달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기도할 이유가 없다.
…(중략)… 그게 바로 하늘나라며 인간들이 영원히 살아갈 바른 삶이다.
- 「가난한 예수처럼 사는 길」 중
(168p)
모두가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 가난을 지켜야 한다.
가난만이 평화와 행복을 기약한다.
가난이란 바로 함께 사는 하늘의 뜻이다.
- 「가난이라는 것」 중
(241p)
언젠가는 우리 모두 죽는다. 그러니 절대 앞서지 말자는 것이다.
그리고 뒤처져 있다고 불행하다는 생각도 하지 말자.
작은 꽃다지가 노랗게 피어 있는 곳에도 나비가 날아든다. 작은 세상은 작은 대로 아름답다.
-「자유로운 꼴찌」중
(123p)
작가의 삶과 주변 인물들에 대한 따뜻한 이야기 말고도 <빌뱅이 언덕>에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작가의 비판도 담겨 있다. 전쟁과 가짜 정권으로 아무 이유 없이 피해를 입어야 하는 우리 민중의 삶이자 서민 개개인의 삶, 시와 동요와 동화를 잃어버린 아이들, 인간의 지나친 욕심으로 인한 자연의 파괴, 전쟁과 약탈을 일삼고 물질을 지나치게 갈구하는 '악마' 같은 인간의 모습을 마주하도록 하는 것이다. 특히 사람다운 사람, 즉 아름다운 사람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어졌다고 말하는 작가가 생각하기를 가장 아름다운 인간에 속하는 어린 아이들 또한, 요즘 시대에는 자연을 멀리 하고 경쟁만 부추기는 삭막한 환경에 놓여 있다는 점을 작가는 꾸준히 지적해왔다. 그리고 위기에 처한 아이들을 위해 어떤 이야기를 써야 할지 고민스럽고 어렵다고 털어놓는다. 이런 작가의 고민은 곧 우리들의 현실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작가는 아이들의 시심(詩心)을 되돌릴 수 있는 방안으로 자연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대안이 담긴 글은 93년에 쓰여진 것이지만, 요즘 농촌체험과 주말농장이 각광받는 참교육으로, 귀농이 참살이로 떠오르는 추세를 보면 작가가 제시하는 대안은 선견지명인 셈이다. 옛 농촌의 아이들은 작은 생명의 씨앗을 정성들여 키워가는 농부들의 시(詩)를 들으며, 풀꽃놀이와 흙놀이, 물놀이를 통해 자연을 벗삼아 놀았다. 시와 노래와 동화는 곧 자연과 함께 아이들의 삶 속에 어우러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딱딱한 콘크리트 벽을 마주하며 그 흔한 풀꽃 이름조차 모른 채 살아간다. 이렇게 '자연으로부터 격리당한 아이들에게서 진정한 시인을 기대할 수는 없다.'(161p)
어릴 때부터 남의 것을 경쟁적으로 가르치기 보다 우리 것부터 소중히 하도록 하고 자연의 온갖 작은 생명들을 접해보도록 하는 것이 아이들의 삶에 앞으로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듯싶다. 다만 실천이 어려울 뿐이며 우리 아이가 뒤처지지나 않을까 불안할 뿐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풍족하고 편리해진 이 세상에 어른들과 더불어 아이들 또한 왜 행복하지 않은 건지, 왜 요즘 청소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인 일까지 일어나는 건지 우리 모두가 재차 생각해 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다운 인간을 기르는 전인교육의 참의미를 강조했던 권정생 작가의 사상은 무척 중요하다.
그의 산문들은 …(중략)… 동화나 동시와는 다른 차원에서 우리의 눈을 어떤 근본적인 곳으로 향하게 했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무심한 일상생활이 실은 얼마나 잘못된 허구적 욕망에 기반하고 있는지를 깨닫도록 만든다. -염무웅 문학평론가 (353~354p)
하늘, 민들레꽃, 강아지, 아이들, 우리 것 외에 작고 하찮아도 가련한 것이라면 연민과 사랑으로 바라보고 보듬었던 권정생 작가. 아이를 업고 있는 몽실언니의 모습과 강아지똥과 함께, 권정생 작가는 나의 가슴 한 구석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그를 잃지 않아야 진정한 인간답게 생을 살아가리라 믿는다.
민들레 꽃씨가 풀풀 흩날리는 <빌뱅이 언덕>을 읽고 나니 아주 오랜만에 그림책 동화를 펴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