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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520번의 금요일 + 봄을 마주하고 10년을 걸었다 +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의 말을 이어갑니다 - 전3권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지음, 사단법인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 온다프레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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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고 귀한 책은 잘 받았습니다. 쉽게 읽기는 힘들겠지만 천천히 잘 음미하며 읽어보겠습니다.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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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출판이라고 - 여성 코미디언에 빠진 너드걸의 출판 프로젝트
김민희 지음 / 더라인북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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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인 출판사 책덕의 김민희를 생각하면 여러 장면이 떠오른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땡땡책협동조합의 활동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그의 멀티 플레이어다운 모습들. 글을 쓰고 번역을 하고 강의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디자인을 하고 행정과 실무적인 일까지 뚝딱 해내는 장면. 김민희를 아는 사람들이 왜 그를 두고 천재 김민희라고 호명했는지, 저절로 수긍이 되었더랬다.

 


나는 책덕의 책을 통해 미란다 하트를 알게 되었고, ‘민디 케일링에이미 폴러를 만나게 되었다.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을 즐겨듣고 있던 시기에, 이런 외국의 여성 코미디언의 존재를 뒤늦게 접하게 된 나는, 그야말로 왜 여성은 웃기지 못하는가라는 편견에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생겼다. 당시 책덕의 에세이를 읽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와 힘을 얻었다. 김민희는 나에게 신문물(!)을 전해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내 추측으로 김민희는 타고난(!) 천재였고, 영어를 잘 하고, 편집자 출신이니, 책 또한 손쉽게 뚝딱뚝딱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책을 좋아하지만, 책을 만드는 과정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저자에 대해선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편집자의 역할과 수고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출판과 유통구조에 대해서 나 같은 독자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 책 <이것도 출판이라고>를 읽는 내내, 나는 이 아니라 출판의 과정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도 출판이라고>1인 출판의 고된 과정을 그린 책이다. 번역서의 판권을 따오는 방법에서부터 출간된 책의 마케팅의 과정에 이르기까지, 고군분투하는 모습들이 귀엽고(!) 치열하게 그려진다. (귀엽다는 표현을 굳이 쓰는 이유는, 김민희가 직접 그린 자신의 캐릭터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 특유의 업무 처리 방식에 비롯된다. 가령, ‘교보찡이라는 애칭을 붙여주는 일과 같은..ㅋㅋ) 대형 출판사와 유통사가 시장을 틀어쥐고 있는 이 시스템 안에서 1인 출판사가 책을 만들고 판매하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지는 너무나 직관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 이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어떤 분야도 큰 기업들이 장악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까. 하지만 김민희와 책덕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세계에서 버티고 살아내고 있다. 그리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새로운 방식을 시도한다.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것은 안 돼, 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저게 바위가 맞는지, 우리가 던지는 게 날계란이 아니라 삶은 계란이라면 좀 더 낫지 않은지, 질문하며 몸으로 부딪힌다. 방구석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던 김민희는 정말 자신만의 방식으로 <미란다처럼>이라는 번역서 한 권을 들고 세상의 구석구석으로 가 닿고 있었다. 그 과정들이 눈물 나게 귀엽고, 또한 너무나 치열해서 눈물이 났다. 동시에 독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당신만의 방식으로 하고 있는가?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안정이라는 보이지 않은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저 하나의 부속품으로 굴러가고 있지는 않은가? 인생을 살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그것을 나만의 방식으로 실천하는 것, 언젠가는 가능한 일이 되긴 할까. 이 책을 읽고 나서 생각해보니, 이 책의 제목을 <이것도 인생이라고>로 바꿔 읽어도 좋겠다 싶었다. 결국 사는 게 이런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책 한 권 내고 망해도 좋다는 신념(!)으로 1인 출판의 길을 걷고 있는 책덕은, 그 한 권을 시작으로 코믹 릴리프라는 시리즈를 만들어 덕후다운 기질을 마음껏 발휘하여 여성 코미디언의 에세이를 출간하고 있다. (코믹 릴리프라는 시리즈가 만들어진 과정도 정말 책덕답다!) 그리고 독자로써 작지만 큰(?) 바람이 있다면 책덕의 이 시리즈가 언젠가는 한국의 여성 코미디언의 에세이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나도 이상하고 멋진 것을 발견하는 독자가 되어, 너드걸이 활개 치는 세상에 일조해야지. 김민희와 책덕의 프로젝트에 무한한 애정과 응원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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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숫자 - 국가가 숨기는 불평등에 관한 보고서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지음 / 동녘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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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는 말을 한다.’

누군가 그랬던가. 어떤 통계든 객관적일수는 없다고.

이 책 <분노의 숫자>를 읽고 난 후, 처음 들었던 생각이었다.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수많은 통계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불평등한지를 뒷받침하고 있는 구체적 자료이며, 이 숫자들은 모두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주고 있다고 말이다. 마치 책 제목처럼 숫자들은 분노를 하고 있었다.

 

불평등에 대한 불감(不感). 나에게만 해당되는 일일까.

다를 수 밖 에 없는 출발점, 그로 인해 달라질 수 밖 에 없는 결과.

어느 순간, 나는 그리고 우리는 그들만의 리그를 지켜보며, 태생이 다르니 어쩔 수 없지, 그들은 그들의 인생이 있는 것이고, 나는 내 인생이 있는 것이라며 그들의 특권적 삶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불평등으로 인한 시샘과 질투, 혹은 분노는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로 인한 격차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자연스러워 졌고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서로의 살아가는 방식을 존중해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삼성이 잘 나가는 것이 그 기업이 잘나서가 아니었고, 현대차가 많이 팔리는 것이 더 이상 우리 사회 대다수 서민들에게 득 될 것이 하나 없으며, 동네에 기업형 슈퍼마켓 들어오면 다양한 물건을 싸고 편리하게 살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 전부가 아니었으며, 정부의 말만 믿고 마지막으로 내 집을 마련 기회라며 무리하게 은행 대출을 받아 집을 샀던 것도 다 바보천치 같은 판단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뒤늦게 서야 깨닫고 있다. <분노의 숫자>는 우리가 이토록 바보천치 같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 대해서 유의미한 통계치를 제시하며, 조목조목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국민이 호구여야 나라 경제가 편안하다?

 

이 책 각 장의 순서는 마치 한 사람의 인생을 천천히 돌아볼 수 있게 도와준다. 한 명의 아이는 어떻게 태어나게 되는지, 어떻게 키워지고 어떤 교육을 받게 되는지, 또 어떻게 일자리를 찾고 어떻게 결혼생활을 만들어 가는지, 어떤 집에서 살고, 어떻게 소비를 하고, 또 어떻게 아픈 곳을 치료받으며 결국은 어떻게 죽어 가는지에 대해 아주 굴곡이 많은 사람의 아리랑곡선을 보는 것처럼, 묵직한 마음으로 읽어갈 수 있다. 각종 통계자료들과 도표들이 마구마구 던져지지만, 이 책의 아주 중요한 키워드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바로 불평등에 관한 이야기이다.

많은 사람들이 2080의 사회에서 이제는 199의 사회로 전환되는 것을 목도하였고, 그 와중에 주류 사회에서 내쳐진 그 수많은 사람들은, 혹은 처음부터 주류의 반열에 들지 못했던 더 많은 사람들은 그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며 설움을 참아내고 살아가고 있었다. 정말 이런 결과는 그 수많은 사람들의 무능력과 게으름 탓인가.

정작 그 불평등한 사회를 조정해야 하는 역할을 해야 할 국가가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불평등함에 대해 묵과하고 스스로 주류의 계층에 합류하거나 그들에게서 콩고물이라도 받아먹으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왜 정부는 부동산 가격이 이렇게 올랐는데 오히려 집 없는 서민에게 주택구매를 유인할까. 저축만으로 집을 사는데 걸리는 시간이 27년이나 된다면, 우선 주택의 가격이 지나치게 높은 점을 의심해야하는 것 아닐까. 게다가 저소득층의 주거비가 고소득층에 비해 월등히 높다면 이를 개선하기 위한 전월세 보증금 상한제와 같은 정책이 진작 나왔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언론이라면 응당 사회의 문제에 대해 분석하고 비판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렇지만 언론 역시 우리 사회가 이처럼 불평등해진 근본적 원인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해 왔다. 그저 정부가 내놓는 통계를 잘 포장해서 기사를 쓰거나, 스스로 자본의 권력이 되어 모든 것이 장밋빛인 것처럼 과장하기 일쑤였다. 도대체 경제가 성장했다고 하는데 국민들의 가계 소득은 왜 그대로인걸까. 그러면서 어떤 노조의 파업으로 국가 경제가 흔들리는 것처럼 호도하는 언론들은 도대체 국민들을 얼마나 호구로 여기고 있는 것일까.

이윤 극대화가 지상최대의 과제인 기업, 특히 재벌기업의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다. 삼성전자 임원은 왜 일반 노동자보다 137배나 많은 연봉을 받아야 하는지, 그 많은 세금으로 기업 연구 개발에 쓰라고 지원해주었던 돈 마저 한 푼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두더니, 이제는 골목 상권까지 치고 들어온다. 기업은 소비자의 환심을 사서 지갑을 열게 하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목적이다. 이를 위해 자신이 고용하고 있는 노동자가 어떤 상황에서 일을 하든지, 소비자가 과대광고에 속아 손해를 입는 일 따위는 기업의 관심사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기업은 정부와 언론이라는 거대 권력을 적절히 이용하며 그들의 특권을 지속적으로 누리려는 꼼수까지 부리고 있다. 결국 정부는 세금으로 기업을 지원해주고, 기업은 이 부분을 다시 정부에게 로비자금으로 돌려주는 형식이다. 언론 또한 이 커넥션에 적절히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정부, 언론, 기업은 언제나 사람보다 돈이 먼저였다. 이런 와중에 왜 우리 사회가 이처럼 불평등해졌지, 그 근본원인에 대해서는 어느 누가 관심이나 있겠는가. 세상 사람들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정부-언론-기업이라는 거대 권력이 쏟아내는 것일 텐데, 그들의 기준에서 잘 살고 못 살고는 결국 개인의 탓으로 귀결될 수 밖 에 없다. 사람들은 그렇게 스스로 자학하며 이 사회를 견뎌내고 있었을 것이다. 송파 세 모녀가 마지막 가는 길까지 죄송하다며 사죄하듯 말이다.



 

분노하자. 그래서 세상을 바꾸자.

 

이 책 <분노의 숫자>에서 언급되는 각종 통계자료들은 사회 현상에 대해 조금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많이 들어본 이야기일 수도 있다. 물론 진보적인 매체나 균형 잡힌 시선의 사회과학도서까지 읽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 사회를 살아가면서도 충분히 불평등함을 느낄 수도 있다. 그래, 한국 사회가 이처럼 불평등한 것, 인정한다. 지금도 충분히 평정심을 갖고 살기 힘들기도 하고, 짜증나고, 기회만 된다면, 어디 저 멀리 다른 나라로 이민이라도 가고 싶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할까.

책은 각 에피소드별로 숫자의 진실, 즉 불평등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각 장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이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의 힘이자 성과라고 생각된다. 사회 전반에 걸쳐 다방면에서 연구해온 결과물들이 있기에 이런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더 중요하게 읽혔던 부분은 에필로그였다. 2020년의 대한민국 사회를 사는 사람들의 삶. 어쩌면 허황되어 보이고 그저 꿈속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삶 같지만, 그 변화의 시작은 보잘 것 없는 하나의 움직임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우리 사회를 면밀하게 들여다보자. 하나같이 짜증나고 울화통 터지는 일투성이다. 돈 없다고 차별받고 멸시당하는 사회, 일의 경중을 따지고 허드렛일 하는 사람들은 거지 취급하는 사회, 권력과 힘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의 목숨 따위는 쉽게 버릴 수 있는 사회, 인간이 인간답게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 이런 사회가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이에 분노하자. 분노하고 분노하다 스스로 삭히지 말고, 이 분노를 가족과 나누고, 친구와 토론해보자. 왜 이렇게 우리는 불평등한 사회를 살아야 하는지, 왜 돈이 사람보다 중요하게 여겨져야 하는지, 왜 국가는, 언론은, 기업은 그들만의 특권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왜 우리는 존중받지 못한 삶을 살아왔는지, 먼저 툭 하고 던져보자.

그리고 움직여보자. 이런 분노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행동해보자. 아주 작은 움직임이라도 말이다. 책에서 이야기 하듯 이러한 행동이 새로운 희망을 만들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더 이상 주어진 대로 살고, 남이 말하는 대로 듣고, 눈에 보이는 대로 읽지 말자.

그리고 이제는 나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은 버리자. 지금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지속하는 한 우리는 어차피 쓰다 버려지게 될 것이다.

내가 변해야 사회가 바뀔 수 있다.

그래야 희망도 꿈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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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골드만삭스를 떠난 이유 - 나는 더이상 고객을 멍청이로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레그 스미스 지음, 이새누리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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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 전 즈음,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던 내가 했던 첫 번째 일은 모 은행의 마이너스 계좌를 만드는 것이었다. 입사와 동시에 독립을 해야 했기에 목돈이 필요하기도 했고, 십 수 년 간 내 뒷바라지를 위해 빚을 진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소위 안정된 직장에 입사하여 좋은 신용등급 덕분에 저리로 마이너스 통장 개설이 가능하다는 동료들의 깨알 팁이 나를 은행에서 대접받는 고객이 될 수 있다고 유혹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무려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마이너스 통장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한 축으로는 정기적금으로 돈을 모으면서도 예측되지 못하는 불안을 이유로 마이너스 통장과 신용카드는 손에 움켜쥐고 있는 바보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느 날 문득, 내가 은행에 얼마의 이자를 내고 있는지 계산해보기 전까지, 나는 여전히 은행에게 대접받는 고객인 줄 알았다.

 

은행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금융기관이다. 고객들에게 예금 이자를 주고, 목돈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목돈을 빌려주기도 하며, 때론 푼돈으로 목돈을 마련할 수 있는 황금 기회를 선사하기도 한다. 금융소비자들은 자신에게 이런 혜택을 주는 기관을 절대적으로 믿고 의지한다. 그래서 소비자들은 은행 말만 믿고 전세대출을 받으러 갔다가 집을 사기도 하며, 설명을 들어도 잘 모르겠지만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수익 좋은 상품에 전 재산을 투자하기도 한다. 그들은 늘 신용등급이 높은 나에게만 살짝 알려주는 고수익상품이니 지금 매수하지 않으면 손해 볼 수도 있다는 말로 우리를 자극하곤 한다. 마치 이 시간이 지나면 모든 혜택이 사라져버리는 홈쇼핑처럼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은행의 거짓말에 속고 속고 또 속아 넘어가고 있었다.

 

문제는 금융기관의 흉악한 거짓말이 폭탄돌리기를 하다 어느 순간 터져버리면서 시작된다. 이 책 내가 골드만삭스를 떠난 이유2000년 이후 월스트리트를 중심으로 한 금융기업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수익을 내는지, 어떻게 고객을 이용하고 농락하는지 내부인의 눈으로 실체를 폭로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의 폭탄돌리기로 크고 작게 피해를 본 세계를 향한 저자의 작지만 절절한 외침으로 이 책은 시작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 그레그 스미스는 세계 금융 시장의 중심인 월스트리트에서 잘나가는 금융인이었다. 골드만삭스의 살벌한 입사테스트를 통과해 부사장의 지위까지 올라갔고, 20029·11테러와 2008년 금융위기에서도, 심지어는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가 골드만삭스에게 엄청난 제재를 가하는 와중에서도 살아남았다. 12년 동안 몸 바쳐 일해 온 그가 내부고발을 통해 골드만삭스와 월스트리트의 치부를 폭로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고, 왜 그는 이 이야기를 시작했을까.

 

출처. sbs


자본주의의 맹아, 금융기관들은 여전히 금융공학이라는 복잡한 프로세스를 통해 금융소비자의 쥐락펴락하고 있다. 20세기 이후 점차 몸집을 불려온 금융기관들은 기업의 주식을 사고파는 일에서부터 채권이나 통화와 같은 금융상품 뿐만 아니라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이나 자연·환경·경제 현상을 예측하는 일, 나아가 상품을 사거나 팔 권리를 매매하는 것과 같은 각종 파생금융상품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중요한 것은 공학의 개념까지 끌고 들어오는 금융상품의 핵심이 결국 불확실성이라는 위험을 어디에 더 많이 내포하는냐에 따라 이익도 함께 따라가는 것에 있다.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관이나 개인은 이러한 위험에 대한 정보도 많은 것이고, 이에 따라 더 많은 수익을 창출할 기회를 잡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시장에서 금융기관의 판매자가 제공하는 정보만 가진 그 수많은 개인은 자신이 투자하는 상품에 대해 당연히 제대로 알지 못할 것이고, 그에 따라 막대한 손해를 입는 것 또 한 그 수많은 개인일 수 밖에 없다. 결국 금융기관의 판매자는 복잡한 금융상품의 알고리즘을 제대로 이해하기 보다는 자신에게 월급을 주는 금융기관의 이익에 복무해야 할 의무가 더 크기 때문이다.


그레그 스미스는 월스트리트의 유서 깊은 투자은행이었던 골드만삭스가 점차 고객들을 멍청이, 조종하기 쉬운 상대로 여기게 되었는지,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금융기관의 존재에 대한 필요성까지 부인하지는 않는다. 1999년 이전만 해도 골드만삭스 금융시장에서 투자은행의 윤리, 가령 존 화이트헤드가 만든 14원칙(181~182페이지)과 같은 고객의 투자에 대한 수탁책임과 같은 원칙을 지키면서 신뢰 있는 투자조언을 해주는 역할을 도맡아 했었다. 그러나 이후 회사는 점차 프롭 트레이딩과 같은 방식을 통해 스스로 거대 금융기관이 되어가고자 하였으며 고객들에게 합리적 투자 조언을 해주는 것 대신 고객들을 은행과 경쟁하는 거래 상대방으로 간주하며 고객의 이익보다는 회사의 이익을 위한 선택을 강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비단 골드만삭스의 문제는 아니었다. 신자유주의라는 포메이션으로 갈아탄 세계가 점차 금융시장의 비대화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경쟁자가 되어야 하며 내 돈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돈을 악착같이 강탈해야 했기 때문이다.


출처. 국제신문


어쩌면 이런 이야기들이 일부 돈 있는 사람들에게 국한된 이야기로만 들릴지 모르겠다. 어차피 많은 사람들은 한 달 월급으로 겨우겨우 생활하고 남은 쥐꼬리 만 한 돈으로 적금 몇 푼이나 넣으면 다행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전셋집 하나 얻으려고 은행 대출 담당 직원에게 몇 번이나 굽신거렸는지, 대출을 받으려면 연계된 펀드에 가입해야 한다고 해서 가뜩이나 쪼들리는 살림에 원하지 않던 펀드 통장을 만들어야 했던 인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 발 금융위기가 나와는 무슨 상관이었는지 모르겠다. 대출 금리는 왜 오르고 내리는지, 신용카드를 만들어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만 쓰라고 그러는지, 전세대출을 받으러 갔더니 지금이 내 집 마련 기회라며 집을 사라고 부추기는지, 그저 그런 것들이 불만스러웠을 뿐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도 언급되어 있듯이 금융기관들이 이야기하는 고객은 더 이상 회사가 돌봐줄 고객(顧客)이 아니다. 회사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의심조차 하지 않을 호구이자 멍청이이다. 골드만삭스를 비롯한 월스트리트의 거대 금융기관들은 그들의 비윤리적 행태를 통해 버블을 키웠고 엄청난 금융위기를 초래했다. 그로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집을 잃었으며,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이윤 중심적 사고는 더 큰 폭탄이 되어 전 세계를 돌고 있다. 이 폭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국가는 없다. 그리고 더 이상 국가는 국민의 피해를 막아줄 수 있는 자비로운 부모가 아니다. 외환위기에 쓰러져가는 금융기관을 국민의 피 같은 공적자금으로 일으켜 줬더니 수많은 규제를 풀어 파생상품시장을 키우고 신용카드 발행을 남발하더니 결국 카드대란을 일으키게 했던 것은 누구였는지, 키코 사태 때 금융기관의 편을 들어준 이는 누구였으며, 부동산 시장의 거품을 걷어내는 것도 모자라 싸게 대출해줄테니 집을 사라고 부추긴 것은 누구였는가. 또 한 번의 폭탄이 터지는 순간, 더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충분히 예고되고 있다. 이래도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일까.

 

그래서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레그 스미스가 이야기하듯 금융기관이 다시 초심을 찾아 도덕적인 시스템을 마련하면 되는 것일까.

좀 더 합리적이고 윤리적인 투자를 통해 금융시장의 정상화만 회복하면 되는 것일까.

어쩌면 이와 같은 금융시장의 비정상화는 자본주의의 당연한 수순이 아니었을까.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가 타고 있는 배의 선장의 잘잘못을 가리고 새로운 선장을 찾는 데에만 힘을 썼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새로운 선장을 고르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배가 제대로 바다를 지나왔는지, 제대로 된 방향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토론하는 것이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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