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신이라는 착각 - 확신에 찬 헛소리들과 그 이유에 대하여
필리프 슈테르처 지음, 유영미 옮김 / 김영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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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신이 아니다'라는 말을 자주 쓰는지 생각해보자.

일단 나는 자주 쓴다. 우리 주변에선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우리가 그들에게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하는 이유는, 내가 옳다고 믿는 확신에 반하는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가 정답이고 가장 이성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연 진짜 그럴까? 이성은 정말로 이성적일까? 평소에 그렇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뇌에 문제가 생겨 정신착란을 겪는다면 어떨까?

우리는 스스로 여러모로 굳게 확신하는 세계상을 만들어내고, 다른 사람의 확신이 자신의 확신과 일치하면 그것을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그렇지 않으면 '미쳤다', '제정신이 아니다'라고 한다.

본문 P.50

조금 찔리는 대목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만들고, 그 이분법적인 세계관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에 알고 있다. 정상과 비정상은 상대적이라는 것. 그래서 남에게는 내가 비정상일 수도 있다는 것. 나도 잘 알고 있다.

이걸 정치적 담론에도 적용할 수 있다. 책에 나온 예시를 들어보자.

미국의 시민들 중 '지구온난화가 인간의 활동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를 믿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놀랍게도 공화당 지지자들은 고작 10%만 저 이야기를 믿었고, 민주당 지지자들은 78%가 저 이야기를 믿었다.

이는 공적 담론에서 기후변화를 보는 시각이 정치적 지향의 문제가 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어떤 정책이 중요한지보다 특정 정치집단에 속하기 위해 기후변화의 유무를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해진 것이다.

기후변화가 미국에 경제적으로 해를 끼치기 위해 중국이 고안한 것이라고 말했던 트럼프의 트윗은 아주 유명하다. 물론 모든 공화당 지지자가 저 의견을 믿진 않겠지만, 위의 답변 비율을 보면 절망적인 수준이다.

물론 응답자들이 어떤 확신을 갖고 있든 간에, 모두가 인간이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학문적 증거를 꿰고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기후변화가 인간의 활동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맞는지 틀린지는 별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실 여부를 떠나 우리의 확신은 집단 소속감에 대한 표현인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우리는 속하고 싶은 집단에 의거해 확신을 선택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우리의 확신은 한편으론 속한 집단과 동질감을 느끼고, 한편으로는 타자를 배제하는 데 기여하는 게 아닐까.

신념이 왜 그토록 기만적인가?

나는 일명 '줏대 있는' 여자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소속된 집단에 따라 의견을 정하는 것보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믿고 목소리를 낸다고 말이다. (물론 이것도 남이 보기엔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다른 사람들도 다 '줏대 있게' 살고 있을까? 위 대목을 읽으며 우리 현시대 사람들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명예ㅇㅇ', 'ㅇㅇ호소인'이라는 말을 한번쯤 인터넷에서 접한 적 있을 것이다. 주로 조롱의 의미로 쓰이는 신조어다. 마치 내가 ㅇㅇ이 된 것처럼 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의견과 처지에 공감하고, 동질감을 느끼며 내가 그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고 믿는 이들을 말한다.

'명예백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보자. 예컨대, 나는 동양인이지만 '명예백인'이다.

뉴스에서는 한 백인 남성 경찰이 과잉진압으로 흑인 남성을 사살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다음 뉴스에서는 한 흑인 여성이 동양인 여성을 지하철에서 조롱하고 인종차별했다는 내용을 들려준다. 이때 '명예백인'은 뭐라고 이야기할까?

"저것 좀 봐. 흑인들은 자기들이 차별 받는 건 못 참으면서 동양인은 아무렇지 않게 차별해. 저러니까 노예로 살았겠지. 내로남불의 전형이야. 동양인을 차별한 대가라고 생각하라구. 흑인들이 차별 받는 건 정당해."

...라고 이야기할 것이다.(실제로 내가 인터넷 뉴스 댓글에서 본 말들을 종합한 것이다)

실제 백인이 저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명예백인'이라는 게 아니다. '명예백인'의 말에서 중요한 핵심 포인트는 '흑인들이 차별 받는 건 정당해'이다. 동양인으로서 같은 동양인이 인종차별 당했다는 것 자체보다 흑인 차별의 정당화가 더 중요한 거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저 말들이 얼마나 어이없고 비논리적인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다. 과잉진압으로 사살된 흑인남성은 동양인을 조롱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정당한' 이유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왜냐하면 같은 인종인 사람이 동양인을 차별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위치를 백인과 동일시하면서 흑인 차별을 정당화하는 건 백인들 사이에서도 '폐급' 취급 받을 일이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고 있다. 네이버 뉴스 기사에서, 유튜브 뉴스 댓글에서.

여기서 책 속의 대목을 끌어올 수 있다.

우리는 속하고 싶은 집단에 의거해 확신을 선택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우리의 확신은 한편으론 속한 집단과 동질감을 느끼고, 한편으로는 타자를 배제하는 데 기여하는 게 아닐까.

'명예백인'들의 '흑인이 차별 받는 건 정당하다.'라는 확신은 백인 집단과 동질감을 느끼고, 타 인종을 배제하는 데 기여한다. 그들이 백인이라는 집단에 속하고 싶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저런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사고방식으로 타인을 공격하는 것이다.

물론 내 말이 완벽하게 맞는 예시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많은 독자들이 이해할 거라고 믿는다. 자매품으로 '재벌호소인'이나, '명예일본인'도 있다.

왜 같은 것을 보고 서로 다른 논리에 빠지는가?

살면서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만났을 때 가장 궁금한 것중 하나다. 같은 교육과정을 거치고 자랐는데 대체 왜 저렇게 제정신이 아닌 건가. 우리는 그 정답을 찾을 수 있을까? 과연 내가 알고 있는 게 전부 다 옳은 걸까? 내 뇌는 과연 '정상'일까?

인간관계에 지치고 힘든 독자들에게 특히 추천하고 싶다. 정상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비합리적인지를 깨달을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앞으로도 힘들 때마다 한 번씩 꺼내서 읽을 것 같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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