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적의 단어들
이적 지음 / 김영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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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래 이적의 인스타그램 팔로워 중 하나다. 그를 팔로우하게 된 이유가 바로 이 <이적의 단어들>이었다. 그런데 이게 단행본으로, 그것도 김영사에서 나온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었다. 그래서 당연히 이걸 리뷰하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단어에서 촉발된 단편들

천부적 이야기꾼 이적의 생애 첫 산문집

우리가 생각하는, 스토리로써 이어지는 산문집은 아니다. 한강 작가의 <흰>을 생각하면 편하다. 제목처럼 각 단어(제목)에 관한 짧은 산문이 한 장씩 적혀 있다. 가볍게 출,퇴근길에 읽기 좋은 책이고, 생각할 거리도 많은 책이라 직장인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다.

내가 인스타로 보고 저장해두었던 것들도 책에서 찾아볼 수 있어 좋았는데, 그중 두 단어를 소개해 주고 싶다.

눈사람

A씨는 폭설이 내린 다음 날 남자친구와 거리를 걷다가, 길가에 놓인 아담한 눈사람을 사정없이 걷어차며 크게 웃는 남자친구를 보고, 결별을 결심했다.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진 않았다. 저 귀여운 눈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부술 수 있다는 게 놀라웠고,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이 소름 끼쳤으며, 뭐 이런 장난 가지고 그리 심각한 표정을 짓느냐는 듯 이죽거리는 눈빛이 역겨웠다. 눈사람을 파괴할 수 있다면 동물을 학대할 수 있고 마침내 폭력은 자신을 향할 거라는 공포도 입에 담지 않았다. 단지 둘의 사이가 더 깊어지기 전에 큰 눈이 와준 게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P.93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는 있겠지만 나는 이 글을 읽고 '이런 사람들이 서울대에 가는구나.' 생각했다.

작년 겨울 즈음엔가, 이런 '눈사람 논란'이 온갖 매체에서 잔잔하게 불타올랐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이게 왜 논란인지조차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남이 열심히 만들어놓은 눈사람을 고작 자신의 재미를 위해 부수는 사람. '저런 사람은 범죄자가 될 거야,' 는 비약일 수 있겠지만 '저런 사람과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아,' 는 정상적인 반응 아닌가?

인스타그램 릴스에서 이런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계정주가 열심히 만든 눈사람을 웬 남자가 걸어와서 부수고(정말 다짜고짜), 계정주가 황당해하며 뭐 하는 거냐고 묻자 가운데 손가락을 올리고 갈 길 가던 그런 영상. 남이 공들인 탑을 부수는 데에서 희열을 느끼고 본인의 자존감을 찾는 건지 뭔진 모르겠지만, 그런 곳에 '사이코패스'라는 정식 병명을 붙여주고 싶진 않다. 그냥 찐따 같다.

그렇게 남의 공든 탑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평생 아무에게도 사랑 받지 못하고 관심도 받지 못하는 삶. 남의 노력을 짓밟아야만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삶. 혹자들은 그런 사람이 불쌍하다고들 하는데... 아니, 난 전혀 불쌍하지도 않다. 그냥 아무 감정도 안 든다. 계정주의 눈사람을 부수고 손가락 욕을 날린 저 사람은 나에게 인간 이하의 생물체일 뿐이다. 살아있는 것조차 혐오스러울 정도일 뿐이다. 세상에는 인간 답지 못한 인간이 너무 많다.

리셋

고객님께 드리는 것은 다름 아닌 리셋 버튼입니다. 이 버튼을 누르면 당신과 주변의 모든 상황이 5년 전으로 되돌아갑니다. 당신은 젊어질 것이며 실패는 원점으로 돌아가 재도전이 가능해집니다. 물론 그간 성취가 있었다고 해도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겁니다. 최근 5년 사이에 돌아가신 사랑하는 이가 있었다면 예전처럼 생존해 계실 것이고, 그사이 연인으로 발전한 커플은 다시 남남이 될 겁니다. 그리고 당연히 5년 내 태어난 생명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상태로 돌아갑니다. 당신은 버튼을 누르시겠습니까?

P.57

'N'인 내가 자주 하는 상상 중 하나다. 어디선가, 전지전능한 존재가 내 앞에 나타나 세상을 5년 전으로 돌려주겠다고 한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사실 나는 YES라고 대답할 것 같다. 만나이로 따지면 내가 지금 스물둘, 5년 전이면 딱 고등학교 1학년. 지금 기억을 갖고 갈 수만 있다면 진짜 미친 듯이 공부만 할 것 같다. 누군가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그래도 난 그럴 것 같다. 5년 동안 겪고 깨달은 게 너무 많으니까. 내가 5년 동안 이루어왔던 성취들은 어차피 한 번 더 어떻게든 이뤄낼 수 있을 거다. 그래서 아예 고1, 시작점에서부터 다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히 든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이야기들과 조금 섬뜩한 이야기들도 이 속에 잘 스며들어 있다. 짧은 산문집을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취향에 잘 맞을 것 같다. 책갈피줄도 있어서 짧게 짧게 읽기 딱 좋다. 정말 추천한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지원 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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