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용어의 탄생 - 역사의 행간에서 찾은 근대문명의 키워드
윤혜준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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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윤혜준은 영문과 교수로 영국 문학, 비교 문학 등을 주 연구로 삼고 있으나, 그와 동시에 서구 근대문명에 대한 종합적이고 깊이 있는 탐구를 시도하며 30여 년 인생을 연구에 공을 들였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이 책은 여러 분야의 다양한 주제에 걸쳐있는 역사 이야기를 각 키워드에 따라 탐사하고 수집한 결과를 공유" 하고자 함을 밝힌다. 즉 이 책은 '근대 용어'라는 단어를 하나의 실마리 삼아 근대 서양 문화의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다양한 책의 원문을 발췌-번역하여 제시하는 백과 사전식 저작물이다.

책에는 총 스물네 개의 단어가 제시되어 있다. 책의 제목이 근대 용어의 '탄생'이다 보니 독자의 입장에선 언뜻 근대에 이르러 새롭게 생겨난 단어를 생각하게 되는데, 막상 제시되는 단어는 무無에서 유有로 창조된 단어는 아니다. 이 단어들은 머나먼 기원을 가지는 것도 있고, 대부분 근대 이전에 다양한 문헌에서 맥락과 함께 발견되고 쓰이던 기존의 단어들이다. 즉 제목이 가리키고 있는 '탄생'이란 기존의 단어가 사회 환경의 변화를 반영하며 끝없이 의미 변화를 일으키며 재탄생된다는 의미이다.

선별된 단어는 알파벳 A-Z의 순서에 따라 제시된다. 각각의 단어가 어떠한 인과 관계나 선후 관계에 놓인 것이 아니므로 이러한 사전식 배열은 최선이었다고 생각한다. 각 챕터의 실마리가 되는 단어들은 민주주의, 자본주의, 비지니스, 계몽, 진보, 유토피아 등이다. 근대 이후 사회적 체제와 경제 산업 구조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 급변하였는데 이와 밀접히 연관된 단어들로, 현대를 살아가는 이 시점에도 이들 단어는 퍽 유효하다. (물론, 현대 용어의 탄생이라는 책이 발간된다면, 그 책에 선별된 단어들은 이 책의 단어들과는 사뭇 다르겠지만 말이다.

각 챕터의 구성은 우선, 영단어가 우리말로 존재하는 경우에는 우리말 한자어 풀이를 개략적으로 제시한다. 다음으로는 (영)단어의 기원, 그리고 단어의 변화 과정에 따른 근대의 특성을 제시한다. 물론 이 책의 저자는 영문학자이므로, 이 책의 핵심은 우리말 단어에 대한 소개가 아닌 '영단어'에 대한 탐구이고 그렇다 보니 당연히 서구 문화를 소개한다. 이들 중 꽤 흥미로운 내용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만 소개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consumption(소비), 이 단어는 라틴어 'consumere'에서 유래한다. '다 가져가다'라는 뜻의 이 라틴어 단어는 사용해버리다, 먹어버리다와 같이 사용되었으며, 영국 의학서에서 이 단어는 기력과 생명을 소모시키는 불치병의 뜻으로 쓰였다. 이처럼 근대 이전의 consumption은 부정적 뉘앙스로 사용되었으며, 17세기에 이르러 경제 활동에 사용된 consumption 또한 '지갑의 소모병'이나 '불치병과 같은 낭비의 증상'쯤으로 통용되었다. 하지만 농업을 통한 자급자족 경제에서 벗어나 시장 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소비'의 증가는 일자리의 증가와 경제 발전으로 밀접하게 연관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사회 변화 속에서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이 단어를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로 확정하며, 소비 행위의 주체를 'consumer'라고 명명한다. 소비를 시장경제의 일상적이고 건전한 모습으로 인정하는 시대가 근대 용어 consumption을 재탄생시킨 것이다.

이쯤 되면 단어가 품고 있던 부정적 뉘앙스는 사라진 듯하다. 하지만 전체주의 시대의 도래와 함께 미국과 유럽 대륙에서 소비의 팽창은 아프리카 대륙 등 식민지 국가에 대한 노동력 착취로 이어진다.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설탕을 소비하는 영국 신사들을 위해 아프리카인들의 생명이 소모되는 현실은, 시장경제에 기초한 사회가 단순히 자본의 논리로 소비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챕터는 이렇게 끝나지만, 우리는 더 나아가 현대 사회에서 consumption의 함의를 재고해 볼 수 있다. 역사의 흐름 속에 끝없이 변모하는 생명체인 단어는 근대에서 현대 사회에 이르는 동안 또 다른 의미가 부여되고 새로운 뉘앙스가 추가된다. 내가 느끼는 현대 사회에서 '소비'라는 단어는 근대에 비해 더욱 확장된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근원 회귀적이다.

'소비'의 한자어는 '사라지다, 소멸하다'를 뜻하는 '소消' 자에 '쓰다, 소모하다'를 뜻하는 '비費' 자로 이루어진다. 사라지고 소멸할 때까지 쓰고, 소모하는 것이 '소비'의 근본 뜻인데, 현대 사회에서 이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근대의 출발점에는 생산과 함께 경제의 양 축을 구성하던 소비가 자본주의의 팽창과 함께 경제적 윤활유 역할을 넘어 재화든, 노동이든, 자산이나 욕망까지도 모든 것이 사라지고 소멸할 때까지 쓰고 소모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부의 소비가 빈자의 소모를 담보로 했던 윤리적 문제에 더해, 개인의 채워지지 않는 욕구에 대한 갈급과 타인을 잣대로 하는 불안과 공허가 소비의 주체를 소비의 객체로 전락시킨다. 그런데 이는 퍽 교묘하여, 더 많은 물질과 잉여물에 대한 책임을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방식임에도, 다양한 광고 문구와 SNS 등을 통해 마치 우리가 현명하고 똑똑하고 자기 권리를 확실히 누리는, 그 어느 때보다 스스로의 존엄을 결정지을 줄 아는 '주체'인 듯 착각하게 만든다. 이는 결국 소비를 하면 할수록 욕망은 더욱 커져만 가고, 채울 수 없는 욕망이 불러일으키는 공허함이 마음과 통장을, 개인 스스로를 병들게 한다. 자신을 모두 소모할 때까지도, 그 후에도 멈출 수 없는 것이 현대 사회의 '소비'인 셈이다.

이처럼 단어는 기원에서 시작하여 수많은 사회 현상을 겪으며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기도 하고, 다양한 쓰임새로 변모하기도 하지만, 그 역사의 출발점으로 끝없이 회귀한다. 현대 사회의 '소비'가 기력과 생명을 소모시키는 불치병, 그러한 부정적 뉘앙스와 불안감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이 책에 제시된 다른 단어들 또한 사정이 비슷하다. 그러니 한 챕터씩 읽다 보면 근대를 표방하는 단어를 필두로 서구의 역사, 문화, 철학과 과학을 탐색하게 되고 이러한 사료에서 저러한 사료까지 넘나드는 저자의 지적 호기심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물론, 이 책에 비판할 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 연구하여 공들인 작품을 누가 뭐라 할 자격이 있을까 싶지만, 그럼에도 긍정적 비판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발전의 계기가 되길 바라며, 책을 읽으며 풀리지 않던 의구심을 몇 줄 더 덧붙인다.) 우선, 이 책에서 제시하는 단어는 영단어이고 영단어의 기원과 서구 문명 사회에서의 변화를 탐구하는 책인데, 글의 구성은 영단어와 이에 대응하는 우리말 단어의 병기이고 챕터의 서두에서 우리말 한자 풀이를 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심지어 첫 번째 단어인 America의 경우는 우리말에 '미국'이라는 단어가 있고 '아메리카'라는 외래어를 사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아메리카'라고 제시한다. 아무튼 독자의 입장에서 혼란을 안고 책을 읽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구성은 끝내 의구심을 남긴다. 각국의 역사에 있어, 서양, 동양을 막론하고 각각의 근대화 과정이 있었을 터이다. 그런데 저자의 집필 방식은 마치 서구에서 동양으로 근대화가 전파된 것이고, 이렇게 유입된 근대의 개념들이 한자어로 번역한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동양 사회에서 이미 근대화가 진행 중이었고, 각각의 개념에 맞는 단어가 생겨났거나 혹은 기존 단어의 의미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후에 서구 문명이 유입되고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각각의 단어에 대응하는 번역이 진행되었을 터인데 말이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역사관에 대해서는 논외로 해줄 것을 당부하고 있는데, 이러한 비난을 예상하며 감수하고라도, 굳이 우리말 한자어 풀이까지 글에 싣고자 한 것은 솔직히 조금은 저자의 욕심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말 병기 및 해석은 제외하고, 영단어를 바탕으로 한 서구 문명사 탐색만 제시했다면 독자 입장에서 좀 더 쉽게 읽히고 독서의 목적이 분명한 책이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저자가 인용하는 많은 자료들의 해석에 있다. 인용하는 자료는 각 단어가 근대의 특성을 어떻게 반영하게 되었는지를 뒷받침하는 근거인데, 이때 자료를 저자 본인이 해석하여 제시한다. 저자의 전문성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이 책이 저자의 평생 연구 관점을 충실히 반영하는 책이기 때문에 해석에 있어서 자의적이 되지 않았나 싶다. 예를 들어 democracy를 민주'주의'로 번역하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인용한 자료의 번역에 있어서는 민주주의, 민주 체제 등을 혼용하여 사용하는데, 이는 분명 저자의 관점이 반영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들과, 말들의 기원, 말에 반영되는 사회상에 관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기대하며 책을 읽었는데, 솔직히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 독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오랜 연구와 노력이 반영된 이 책이 '단어'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출판의 지평을 넓혀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갖고 있는 분들께, 백과사전 식 책을 통해 잡다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싶은 분들께, 용어에 대한 탐구를 기반으로 공부의 지평을 넓히고자 하는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한다.

* 교유당 서포터즈로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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