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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마이 송골매 - 교유서가 소설
이경란 지음 / 교유서가 / 2023년 9월
평점 :
책의 키워드는 제목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듯 '송골매'이다. 송골매를 모르는 사람도 요즘은 많겠지?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떠올리면 되겠다. 배철수, 구창모. 소설 속 주인공들과 작가에 비해 나는 아마 한 세대 뒤인 것 같지만 그래도 어린 나이에 생방송 가요 프로그램에서 무대에 나왔던 배철수가 마이크를 잡자마자 쓰러져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강렬하다. <어쩌다 마주친 그대>나 구창모의 <희나리>는 초등학생들도 떼창을 하던 노래다. 아무튼 나는 송골매 세대라기보다는 소방차와 박남정, 신해철과 윤상, 신승훈과 이승환 오빠를 두고 다투던 세대긴 하지만, '그 시절 우리가 함께 듣던, 함께 사랑했던 가수'에 대한 추억이라면 작가만큼은 풀어낼 수 있을 테다.
'D-100'의 챕터로 시작하는 소설의 첫 번째 주인공은 '홍희'다. 고등학교 시절 성격 좋고 푼수 같지만 정도 많고 의리 있는, 각 반에 한 명쯤 반드시 있는 캐릭터다. 오십이 넘은 그녀는 남편과 일찍 헤어져 힘들게 식당 일을 하며 자식을 키웠고 삶에 대한 열망 따윈 잊은지 오래인데, 그런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일이 생긴다. 바로 '송골매 재결합 콘서트'이다. 콘서트 표를 사고 혼자서 가면 그만이지만, 홍희에게 '송골매'는 소녀 시절에 사랑했던 영원한 오빠들을 보는 것 그 이상이다. 송골매는 오래전 닫힌 문을 여는 열쇠인 셈이다. 그녀가 오랜만에 열어 보는 세계는, 송골매 오빠들과 동시에 오빠들을 같이 좋아하며 온 삶을 함께 나누었던 친구들이 있는 세계이다. 이제 홍희가 열망하는 것은 바로 그 시절, 돌아올 수 없는 날들을 함께 한 친구들이다.
송골매 재결합 콘서트는 이처럼 고등학교 시절, 사총사라고 불렸던 친구들의 재결합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네 명의 여주인공을, 각자의 중년의 삶의 사정을,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에서부터 비롯된 인생과 관계에 대한 탐색을 한 쾌로 엮어주는 역할을 한다. 네 명의 주인공은 각각 성격도, 외모도, 환경도, 인생도 다르지만 읽는 독자의 입장에선 한없이 친숙하다. 여고 시절을 떠올리면 내 친구 누구하고 꼭 같네 하고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인물들. 작품은 각 챕터별로 그들의 고등학교 시절과 그 시절에서 이제는 멀어져 버린 중년 여성의 삶을 모자이크 한다. 에피소드 형식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송골매 콘서트가 가까워지는 'D-day'를 향해 갈수록 하나로 모이는데, 누구나 다 짐작할 수 있는 결말이지만 과연 그들이 어떻게 재회하고 어떤 모습으로 조우하게 될 것인가라는 궁금증을 버릴 수 없다. 다 아는 결말,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모두의 해피엔딩임에도 끝까지 책을 덮을 수 없는, 일종의 통속 드라마 같달까.
또 하나, 이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노래'이다. 송골매가 등장하는 것은 작품의 마지막 단 한 장면뿐인데, 작품이 진행되는 내내 그들이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중간중간 그들의 노랫말이 적재적소에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본디 소설 속 노래(시)의 인용은 감정과 여운의 깊이를 더하고, 생략된 많은 말들을 대신하며 서정을 증폭시킨다 하지 않았던가. 열 마디의 말보다 한 소절의 노래가 때로는 인물의 심리와 작품의 정서를 더 잘 전달하는 법이다. 하물며 송골매의 팬이라면, 그렇지 않다 해도 가수를 좋아하고 그들의 노랫말을 삶의 의지 삼아 세월을 견디고 추억을 쌓아 본 이들이라면. 이야기 속 노랫말이 주는 감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영리하게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노랫말을 등장시킨다. 그리고 이 노래들은 마지막 장면에서 '어쩌다 마주친' 하지만 '영원히 서로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기도와 축복과 삶으로 폭발된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이제는 중년의 여성이 되어버린 나는 사실 이 작품에 처음부터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다 잘 알고 있는 이야기는 굳이 읽고 싶지 않으니까, 모든 우연의 요소들이 결합하여 우리가 다 행복해지는, 그런 반짝이는 순간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으니까. 혹은 어쩌다 찾아온 그 순간조차 그 뒤에 이어질 공허와, 일상의 간극을 먼저 생각하며 외면하기 마련이니까. 끝까지 이 책을 순수한 소녀의 마음으로 두근거리며 읽을 수 있을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작품은 흥미롭게 읽혔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어쩐지 서글퍼졌다.
삶은 때로는 우연하게, 예측할 수 없는 아주 작은 반짝임의 순간을 주기도 하고, 터무니없다고 생각한 해피엔딩이 실제 하는 순간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이고, 우리는 다시 현실을 산다. 변하는 것은 무엇도 없다. 그리하여 삶과 소중했던 이야기 사이의 간극은 깊어가기만 한다. 그런데 오늘 책장을 덮으며 나는 생각한다. 비록 나는 이제는 삶에 대해 기대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고도 서글퍼하지 않지만 말이다. 작품 속 그녀들의 만남이, 삼십팔 년 만의 재결합이라는 송골매의 콘서트가, 비록 오늘, 단 하루만 가능한 그런 날의 이야기일지라도, 괜찮아, 상관없어. 우리는 또 시시하고 평범한 날들을 살아갈 것이다. 기대하지 않고도 서글퍼하지 않지만, 기다리지 않고 열망하지 않지만, 또 어떤 날에는 문득 그 단 하루만 가능한 날이 찾아올지도 모르지. 불과 몇 년 전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난 믿지 않았을 것 같다. 그건 너무 유치하고 격이 없지 않니. 너무 흔해빠지고 통속적인 이야기 아니니. 그런데 그게 삶이라는 걸 요즘의 나는 깨닫는다.
문득 잊혀진 친구, 사라진 추억, 이제는 까마득해져버린 학창 시절의 우정, 그 모든 순수했던 삶의 시간이 그리운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더불어 '노래'의 힘으로 슬픔과 기쁨을 위안하며 사랑과 공감을 나누었던 추억을 가진 이들에게도 이 책을 추천한다.
*교유당 서포터즈로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