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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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될 것 같은 예감이다. 하지만 그걸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 글쓰기를 생각해본다,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하고 -P15쪽- 
 
조금 우스운 소리지만 나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해본다. 내가 작가가 된다면? 이라고,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가장 좋은 글감은 경험담 이다. 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을 생각하며 이어 생각에 잠긴다. 나의 연애담? 을 떠올리니 현재의 남자친구가 걸린다. 나의 성장기? 를 떠올리니 숨기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다. 라는 생각을 내가 로또 1등이 된다면? 정도의 횟수로 해봤던거 같다. 

그런데 신경숙의 <외딴방>을 읽기 시작하며 몇페이지 넘기지 않아 등장한 사실도 픽션도 아닌...... 이라는 글귀는 다름아닌 내가 가끔씩 해오던 생각의 해답이었다. 그리고 아직 중간도 읽지 못한 소설 <외딴방>이 어쩌면 전적으로 사실 그대로 쓰인 글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숨기고 싶었고,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글을 시작하면서도 글을 마치면서도 재차 강조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이 글은 사실도 픽션도 아닌 그 중간쯤의 글이 된 것 같다. 하지만 이걸 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 글쓰기를 생각해본다.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하고.-P424-

외딴방과의 재회
머릿속에 문장들이 글로의 변환을 재촉하며 두통을 일으킬 땐 어느곳에 누구와 있던 급하게 집으로 들어가 글을 쓰던 작가 신경숙이 글을 쓰러 제주도에 와 있다. 그런데 이번에 나는 내 스타일을 버린다. 집을 버린다 -P17-  그녀가 버린 것은 스타일이 아니다. 그녀 안에 가둬 두었던 무거운 짐 일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외딴방 속에 꾹꾹 눌러 돌덩이를 얹어 닫아 놓았던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의 그녀 일 것이다. 있었지만 없었던, 그리고 함구 해야만 했던 잃어버린 4년의 시간을 내려 놓으며, 이제 그녀 스스로 그 문을 열려고 한다. 

<외딴방>은 현재의 작가 신경숙과 외딴방의 신경숙의 모습을 교차시켜 보여준다. 작가 신경숙과 열여섯 신경숙의 만남은 단순한 회상이 아닌 실제 과거로의 여행이다. 이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와의 화해와 이해를 이끌어 내며, 동시에 독자로 하여금 잃어버린 시간을 부드럽게 연결할 수 있게 해주는 장치적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작가 신경숙에게는 과거형을 과거 신경숙에게는 현재형에 시제를 부여함으로서, 과거의 나를 고스란히 눈앞에 걸어다니게 만든다. 

작가 신경숙에게 걸려온 전화 한통이 잠들어 있던 그녀의 기억을 깨운다. 영등포 신대방동 장훈 고등학교 뒤편에 있었던 영등포 여고 산업체 특별학급 동창 하계숙. 

전라북도 정읍,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열여섯의 소녀 신경숙, 쇠스랑에 찍힌 발등의 아픔도 잊은 채  엄마가 처방한 쇠똥을 발등에 대고 큰오빠에게 편지를 쓴다. "오빠 나좀 이곳에서 빨리 데려가줘"-P19- 라고. 쇠스랑에 구멍이 뚫린 발바닥이 무감각 할 만큼 열여섯 신경숙의 서울행은 간절하다. 

낮에는 동사무소에서 일하며 밤에는 법대생인 큰오빠의 부름에 열아홉의 외사촌과, 열여섯의 신경숙은 서울에 입성하게 된다. 더이상 동네에서 가장 넓은 마당을 가진 가운뎃집의  딸 신경숙은 없다. 이제 그녀의 집은 30여개의 방이 따닥따닥 붙어있는 가리봉동의 외딴방이다. 도시는 그녀의 신분을 하락 시킨다. 

80년대 노동계급
동남전기 주식회사 스테레오과 에이라인 1번 과 2번 이것은 열여섯의 신경숙과 그녀의 외사촌의 또다른 이름이다. 일을 해야만 그녀들은 '산업체특별학급' 이라는 제도를 통해 고등학생이 될 수 있다. 유신말기 공단의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부당한 대우와 부당한 임금에 허우적 거리며 살아야만 했다. 공장상사의  유린, 임금체불, 그 안에서 일어 나는 노사간의 불합리한 갈등은  공장내 노조를 형성하게 했고, 이들노조는 더욱더 철처히 짓밟힌다. 80년에 태어난 나는 그때 당시의 글이나 영상을 접하면 도대체 저때는 어떻게 저렇게 살았을까? 라는 생각에 가슴 한 가득 빠져나올 틈조차 없는 연기를 머금고 있는 것 같은 답답함이 든다. 

소설 끝부분 '외딴방이 묻는 것과 이룬것' 이라는 제목의 백낙청 문화평론가의 해설에 그는 공장에서 일어나는 호남출신 등의 지역감정의 발로가 전혀 없고 노동자들간에 싸움이나 다툼등이 등장하지 않고 모두들 너무나 온순하고 착한 모습인 것에 아쉬움을 품었었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공장 인물들의 온순하고 착한 모습, 그리고 공장내 갈등과 노조의 갈등등에 깊게 파고 들지 않은 것은 신경숙 그녀가 불과 열일곱 열여덟의 소녀 였기 때문이다. 왜 투쟁해야 하는지, 그녀보다 네 다설살이 많았던 노동자들이 왜 투신을 했어야 했는지 뼈속깊이 그 이유를 공감하지 못했던 소녀 였기 때문일 것이다. 

80년대 노동계급인 그녀와 그녀의 사촌 그리고 공장동료들, 낮에는 회사를 다니고 밤에야 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산업체특별학급 친구들 나는 야간고등학교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회사를 다니며 고등학교를 다니는 학생에 대한 것은 사실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스물넷 다섯의 나이에 고등학교 졸업장을 위해 교복  입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녀보다 네 다섯살이 많았던 그녀의 친구들, 나는 잠시 그래도 그녀는 제 나이때 학교를 다닐 수 있어 다행이다 라는 생각을 했다. 그녀들이 힘들게 견녀내야 했던 고등학교 생활, 어두운 노동자들의 현실의 그 학교마저 중도포기 해야 했던 친구들... 주간학생들의 시선, 그녀들에게 얼마나 상처가 됐을까? 가슴이 아프다.

나는 95년 연재 당시에도 작가 신경숙 그녀가 졸업한 영등포여고 산업체특별학급이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95년은 내가 중학교 3학년이 되던해이고 곧 고등학생이 되던 96년에도 산업체특별학급 이라는 것이 존재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학교의 존재 조차 몰랐던 나는 낮에는 회사를 다니며 밤에는 고등학교를 다니던 그녀들이 같은 세대에 살았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으며, 갑자기 가해자가 된 기분이다. 누군가 묵묵히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왜 알려고 하지 않았을까? 


꿈 그리고 희생  
시골을 떠나오던 외사촌과 신경숙은 각각 사잔작가와 글을쓰는 작가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여러 사람들은 가끔 우리의 인생의 행로를 크게 휘저어 바꿔 놓거나 가지고 있던 꿈의 희망을 짓밟기도 한다. 열일곱 신경숙에게 막연한 작가의 꿈을 실현 가능케 했던 중계자들이 있다. 영등포여고 최홍이 국어 선생님, 그리고 그녀의 큰오빠. 반성문을 써온 그녀의 글솜씨를 보고 소설가가 되기를 권유했던 최홍이 선생님은 열일곱 그녀에게 책 한권을 선물한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 그리고 그녀의 큰오빠, 큰오빠의 희생은 가히 눈물겹다. 그녀의 큰오빠는 동생들을 위해 방위의 신분으로 가발을 쓰고 학원강사를 하며, 그녀들의 가장 노릇을 톡톡히 해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대입 준비를 지원한다. 80년대 노동층의 모든 사람들이 그랬듯, 가족의 한사람이 자신의 젊음을 희생했어야만 나머지 가족들의 생활이 가능했었기에. 이에 큰오빠는 자신의 젊음을 동생들에게 양보한다. 

그녀 외사촌의 사진작가의 꿈은 공장으로 실습나온 공고생에 의해 깨진다. 외사촌이 흠모하던 공고생은 외사촌이 공순이라 싫다고 한다. 이에 외사촌은 공장을 그만두고, 전화교환원이 되려한다. 그녀가 막연히 간직했던 사진작가의 꿈은 공순이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바껴 버린다. 그녀의 꿈은 또 한가정의 한사람이 자신의 젊음을 희생해야만 했던 시대의 비극에 굴복하듯 시골에서 내려온 외사촌 동생의 뒷바라지로 인해 멀리 보내고 만다.  

글을 읽다 보면 외사촌과 신경숙의 큰오빠나 셋째오빠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마치 신경숙 중심 가까이 원을 그려 서 있는 것 처럼 그녀의 누구, 누구로만 등장할 뿐이다. 특정한 인물 누구가 아닌 그 시대의 큰오빠, 그 시대의 셋째오빠, 그 시대의 열아홉 스물의 여인을 대변하듯 말이다. 

외딴방과의 이별
그녀가 외딴방을 기억해 내기 힘겨워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희재언니 때문일 것이다. 초반부터 희재언니의 죽음을 짐작케 했던 작가 신경숙의 글은 희재언니의 부재를 회피한 채 이야기를 끌어가지만 결국 소설 후반부에야 이를 토해내고 만다. 희재언니의 죽음에 방조자가 되어버린 열아홉의 신경숙은 짐도 챙기지 않은 채 외사촌과 외사촌 동생이 사는 집을 향해 도망친다. 그리곤 다시는 외딴방을 찾지 않는다. 어쩌면 희재언니는 외딴방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에서 주인공의 엄마가 부엌 그 자체였듯이, 

나의 외사촌과 나는 그곳을 떠나야 했기에 하고 싶은 게 많았고 되고 싶은게 뚜렷했고 소유할 수 없으나 갖고 싶은 게 많았다......그러나 희재언니는 아니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그 골목이다. 그곳의 전신주이고 구토물이고 여관이다. 그녀는 공장 굴뚝이며 어두운 시장이며 재봉틀이다. 서른일곱 개의 외딴방들이 그녀, 생의 장소다.-P331~332-

열아홉의 신경숙은 그날 외딴방에 문을 닫아 버렸다. 산업체특별학급 출신의 숨기고 싶은 과거, 지독했던 가난함, 묵인했던 큰오빠의 희생, 그녀의 친구이자 언니들이었던 노동자들의 절규와 아픔, 그리고 외딴방 그 자체였던 희재언니를 .... 모두 외딴방속에 꼭꼭 넣어 묻어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열지 않았었다.

외딴방과의 화해
작가 신경숙은 외딴방이라는 소설을 통해 그녀의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의 잃어버린 4년과 화해한다. 그리고 인정한다. 그 4년의 시간이 어느 여공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자신의 이야기라고 그게 작가 신경숙의 십대 였노라고. 

외딴방은 표면적으로는 작가 신경숙이 보낸  4년의 장소에 불과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치부이기도 했다.

누구에 것이 더 크다 할 수 없으나, 우리는 누구나 외딴방을 가지고 있다. 나는 잠시 나의 외딴방을 적다가 다시 지웠다. 나의 외딴방을 열 자신이 아직 나에겐 없는 듯 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나의 무엇과 무엇과 무엇이 나의 외딴방이라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 작가 신경숙이 소설 <외딴방>으로 이뤄낸 것 처럼 나도 나의 외딴방과 온몸으로 마주할 날이 오기를 바라며 두려움과 기대를 가져보려 한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자신의 외딴방에 문을 열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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