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요일의 기록 - 10년차 카피라이터가 붙잡은 삶의 순간들
김민철 지음 / 북라이프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나는 기억력이 좋다. 아니 좋았다. 내 생에 최초의 기억은 세 살 무렵이다.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 미닫이문이 달린 티브이가 있는 아파트에서 연탄을 갈면서 살았던 기억. 그 후 나는 연탄을 썼던 경험이 없다. 정확하게 어디 살았는지도 기억이 나고 그 앞에 지하철 길이 있던 것도 기억이 난다. 그것이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의 기억이다. 그러기에 이 책의 작가인 김민철과는 반대로 ‘게으름’을 받았다. 외우기 싫어해서 역사를 비롯한 모든 공부를 못했고, 외우기 싫어해서 지난주에 본 영화 줄거리는 기억하지만 대사는 기억하지 않았다. 모두가 기억력이 좋아서 일어난 일이다. 내 기억력이 남들보다 좋기 때문에 외우는 노력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싫어했다.

기억력이 좋지만 ‘성실’은 없는 나도 이 책 저자와 비슷한 부분도 있다. 몸에 기록되어 있는 것들. 영화 줄거리, 대사는 기억 못하지만 그걸 본 감상은 쌓여서 어딘가에서 튀어나온다.

그러나 나이를 먹은 지금은, 기억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심지어 성실도 하지 않아서 몸에 기록도 못했다. 

카피라이터들의 에세이들이 좋다. 

그들의 시각은 틀에 얽매어 있지 않고, 포근하고 다정하다. 그래서 충격적이고, 감각적이다. 

김민철이 소설을 읽으며 사람을 배운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감탄하고, 부러워한다.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등장인물 모두가 말하는 구성. 이사람의 입장에서는 100% 진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30퍼센트 정도의 진실로 변해버리는 구성. 하나의 사건에 대해 각자가 각자의 입장에서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하고, 그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진실을 건져올리는 방식을 좋아한다. (…)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소설을 읽는다. 소설을 읽으며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 막연하게나마 인간을 배운다. 감정을 배운다. 왜 그사람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왜 그런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인지, 왜 분노하지 앟는 것인지, 왜 그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지, 왜 나와는 다른지, 왜 나와는 다른 선택으로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는지 짚어간다. 현실 속에서 사람을 만날 때 희박한 이해의 가능성을 소설을 통해서 약간이나마 늘릴 수 있지 않을까 소망하면서 읽는다.
-49P, 각자의 진실.

머리가 안 좋아서 아무리 공부해도 역사 성적은 늘 그모양이었고, 머리가 안 좋아서 그토록 외우고 싶었던 시 한 편을 못 외운 거였다. 머리가 안 좋아서 지난주에 본 영화의 줄거리를 못 기억하는 거였고, 머리가 안 좋아서 지금까지 그렇게 고생한 거였다. 모두가 머리가 안 좋아서 일어난 일이었다. 아니, 정정하자. 머리의 다른 영역까지 다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유독 ‘기억’과 관련돈 머리는 평균 이하임이 확실했다.
그러나 기억이라는 능력을 상실한 대신 나는 ‘성실’이라는 능력을 얻었다. 말 그대로 나는 끊임없이 읽고, 듣고, 보고, 찍고, 경험하고 배우는 부류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러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인간 부류에 속한다. 한 선배가 농담처럼 말했다.
"넌 나보다 열 배를 열심히 살지만 어차피 열 개 중 아홉개는 잊어버리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나와 같은 분량을 살고 있는 거다."
나는 선배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선배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잊어버린 아홉 개가, 그러니까 내 머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홉 개가 내 몸 어딘가에 ‘기록’되어 있다고 믿는다.

나에게 인생을 잘 살 수밖에 없는 기본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 기본기를 키우기 위해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사진을 찍고, 여행을 다니고, 뭔가 끊임없이 하고 있다. 그렇게 비옥하게 가꿔진 토양이 있어야 새로운 아이디어도 내고, 새로운 카피도 쓰고, 무엇보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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