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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도키오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9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0년 4월
평점 :
“나는 당신 아들이야. 당신을 만나러 미래에서 왔어.”
히가시노 게이고. 이름만으로도 신뢰를 주는 작가들이 몇 명이나 될까.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 중에서도 특히 팬들이 많은 일본 소설 작가이다. 일본에서는 2002년에 첫 출간되었고 이후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며 그의 팬이라면 꼭 읽어야 하는 작품 중 하나로 일컬어진다. 한국에는 2008년에 출간 되었고 2020년 김영사, 비채에서 예쁜 표지와 함께 재출간되었다.
책의 줄거리는 미래의 아들이 갑자기 나타나 주인공 삶의 방향을 바꾸는 내용이다. 처음에 한 부부가 불치병을 앓고 있는 아들을 떠나보낼 준비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가족이 생성된 과정을 설명하고 아들인 도키오가 삶의 끈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쯤 주인공인 다쿠미는 과거 자신이 20대일 때 아들인 도키오를 만난 적이 있다고 아내인 레이코에게 털어놓는다. 이 뒤에 과거로 돌아가 다쿠미와 도키오가 아사쿠사 하나야시키 놀이공원에서 만나는 장면으로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된다.
다쿠미는 한마디로 ‘노답’이었다. 인생 한 방을 노리며 부지런하게 일하기보다는 로또같은 대박을 기다렸다. 철이 없어도 이렇게 철이 없을 수가 없었던 그의 행동을 보고 도키오는 실망하게 된다. (물론 다쿠미는 도키오가 자신의 아들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다쿠미가 아들 앞에서 철없는 행동을 할 때 도키오가 아버지에 대해서 큰 실망을 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면서 계속 읽었다. 막무가내인데다가 기분대로 행동하고 주위 사람들의 걱정은 수가 틀리는 순간 무시해버리는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앞에서 나온 프롤로그의 인물과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그는 개과천선한 듯 보였다. 그리고 그를 훨씬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준 사람이 도키오였다.
도키오는 사라진 다쿠미의 여자친구, 지즈루를 찾는데 도움을 주고 그 댓가로 다쿠미 인생을 바꿀만한 만남들을 계속해서 요구한다. 이 만남이 바로 다쿠미를 버린 친 어머니를 만나는 것이었는데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다쿠미는 쉽게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론 그의 행동은 너무 이해됐다. 하지만 윽박지르면서 싫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은 아들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었지 않았을까한다.
(아주 중요한 스포가 담겨 있습니다. 책을 읽고 싶은 분이시라면 여기서 멈춰주세요!)
가장 감명깊었던 부분은 다쿠미의 친어머니인 도조씨가 다쿠미에게 남긴 편지를 읽고 다쿠미와 도키오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편지에서 도조는 다쿠미의 친아버지이자 만화가인, 그녀가 사랑했던 가키자와 다쿠미에 대해서 말해줬다. 가키자와 다쿠미는 다리를 쓸 수 없었고 유명하지 않아서 가난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우연히 그의 팬이 된 도조가 계속 가키자와를 찾아갔고 그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어느 날 가키자와의 동네에 큰 불이 나게 되고 그를 걱정해서 도조는 가키자와의 집으로 뛰어 들어가게 되지만 이미 불길은 거셌고 도조는 가키자와를 데리고 나갈 만큼 힘이 세지도 않았다. 도조의 얼굴에 절망이 드리워질 때, 이윽고 그와 함께 죽음을 택했을 때, 가키자와는 도조에게 이렇게 말한다.
“부탁이니 지금 바로 도망쳐 줘. 너를 데리고 갈 수는 없어. 그리고 내 몫까지 살아줘. 네가 살아남으려 한다면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미래를 느낄 수 있어.”
결국 가키자와를 버리고 도망쳐 나온 도조는 괴로움에 견딜 수 없이 힘들었지만 곧 다쿠미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삶에 대한 의지를 분명히 드러낸다. 하지만 그녀는 가난했고 이랬다가는 다쿠미 마저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입양을 보낸 것이다.
이 모든 편지 내용을 읽었지만 다쿠미는 여전히 그럴싸한 아름다운 말로 포장해낸 핑계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편지 내용을 저버리려고 했지만 도키오는 그런 그의 모습에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한다.
“죽음을 앞둔 인간의 마음을 알기나 해? 헛소리 좀 작작 해. 불길이 코앞까지 닥쳤다고. 그런 때에 당신은 미래라는 말을 쓸 수 있을 것 같아? 미래를 느낄 수 있다는 말이 그냥 나올 것 같으냐고. 좋아하는 사람이 살아 있다고 확신할 수 있으면 죽음 직전까지도 꿈을 꿀 수 있다는 말이라고. 당신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미래였어. 인간은 어떤 때라도 미래를 느낄 수 있어. 아무리 짧은 인생이어도, 설령 한순간이라고 해도 살아 있다는 실감만 있으면 미래는 있어. 잘 들어. 내일만이 미래가 아냐. 그건 마음속에 있어. 그것만 있으면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어. 그걸 알았기에 당신 어머니는 당신을 낳은 거야.”
내일만이 미래가 아냐. 작가는 어떻게 이런 말을 적어낼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사랑하는 사람의 미래를 보며 자신의 미래가 행복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다는 것. 이 책에는 미래라는 단어가 한 번씩 사람 마음을 때린다. 미래에서 온 아들 도키오. 그리고 계속해서 내일만이 미래가 아니라고 인지하게 되는 다쿠미. 행복한 미래가 어떤 것인지 알려준 가키자와와 그의 말을 듣고 그가 행복한 미래를 꿈꾸게 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간 도조까지. 이 부분을 읽고 얼마나 마음이 울렸는지 모른다.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도키오와 있었던 일을 레이코에게 말하고, 레이코 역시 도키오를 만난 적이 있었음을 떠올린다. 그렇게 서로의 인연을 확인한 두 사람은 마지막 숨을 겨우 내쉬고 있는 도키오에게 작별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다쿠미는 크게 소리질렀다.
“도키오, 들리니. 도키오! 도키오, 아사쿠사 하나야시키에서 기다릴게!”
이 마지막 문장을 읽고 책을 덮었을 때 놀라서 벌어진 입과 먹먹해서 울렁거리는 마음이 책의 소감을 대신해주었다. 내가 이때까지 읽었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은 모두 범죄 미스터리 관련 소설들 뿐이었다. 특히 최근에 읽었던 ‘탐정 클럽’이란 책이 상당한 실망감을 안겨주어서 큰 기대 안하고 읽었는데 왜 그가 그의 이름 하나만으로 하나의 소설 장르를 개척할 수 있었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는 작품이었다. 그의 특기인 미스터리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감동까지 담겨 있는 이 책은 다른 친구들에게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을 정도다.
다시 그의 책에 빠져 다른 책을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