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바우키스의 말 - 2024 제18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배수아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18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인 '바우키스의 말'에는 수상작 '바우키스의 말'을 포함해 총 6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수상작 '바우키스의 말'에 은 '문학적인 성취의 정수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라는 심사평을 받고 당선작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이 소설은 신화 속 '바우키스'라는 인물을 모티브로 한 작품인데, 저 개인적으로는 조금 어렵다고 느껴졌습니다. 독서력이 딸려서인지, 이해력이 모자라서인지, 난독증이 있어서인지 몰라도 저에게 임팩트 있게 다가오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후보작이었던 문지혁의 <허리케인 나이트> 박지영의 <장례 세일>이 더 인상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문지혁 작가님은 <초급 한국어> <중국 한국어> <고잉 홈>을 통해 익숙하게 느껴지는 작가님이셨고, 박지영 작가님의 <장례 세일>은 아들 현수가 평생을 '실패한 세일즈맨으로 살아온 아버지 '독고 씨'의 죽음을 세일즈 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는데, 소재가 아주 신선하고 속도감 있게 전개되고 있어서 개인적으로 저에게는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6명의 작가 각각의 색깔이 아주 확실하면서 우리 사회의 다양한 면면들을 파헤쳐 주고 있기 때문에 지루함 없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소설집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진짜 팔아야 하는 건 독고 씨의 가치 있는 삶이 아니라 가치 없는 삶이었다. 독고 씨는 그렇게 예비된 애도객들의 가치를 높여주는 존재가 될 때, 비로소 자신의 애도 가격을 높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상기시켜야 할 것은 독고 씨의 그래도 싼 죽음이나 그에 대한 슬픔이나 연민, 죄책감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감사 인사를 받을 만한 인품을 지닌 과거의 자신에 대한 그리움과 뿌듯함이었다. 그리하여 독고 씨의 죽음을 통해 다시 한번 그 감사한 인간으로서의 자신과 만나게 되기를, 보여줄 기회를 희망하게 만드는 것이다. (129쪽) - 장례 세일 -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장례식장이 쓸쓸하지 않도록 현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미리 아버지와 인연이 있던 사람들에게 감사 편지를 보냅니다. '저희 아버지는 임종을 앞두고 계십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당신에게 꼭 감사 인사를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라는 내용으로.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잊힐 뻔한 독고 씨와의 인연을 떠올리게 되고, 실제로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조의를 표하러 장례식장에 찾아옵니다. 편지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장례식장에 찾아온 조문객들의 수가 많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내가 떠난 뒤에 나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하고 명복을 빌어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장례 세일을 해서라도 애도의 가격을 높여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건 아닐까? 그런데 나의 장례 세일은 누가 맡아 주지? 나의 장례식장 풍경을 떠올려 보게 했던, 조금을 씁쓸하지만 현실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라서 기시감을 느끼게 했던 소설이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리 따는 사람들
아만다 피터스 지음, 신혜연 옮김 / 서사원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제본(정식 출간 전 임시제본된 도서) 서평단에 선정되어 읽게 된 책입니다.

<베리 따는 사람들>은 전세계 16개국 번역 출판, 2024년 앤드루 카네기상 수상, 2023년 반스 앤 노블 디스커버리상 수상, 뉴요커가 뽑은 2023년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는 등 화려한 이력을 가진 소설입니다. 저한테는 가족 상실과 역사적 트라우마를 다루고 있는 감동적인 소설로 읽혔습니다.

소설은 조와 노마의 시선을 오가며 교차 서술됩니다. 등장인물 한명 한명의 심리묘사가 압권인 소설이에요. 작가의 주옥같은 문장들이 소설을 더욱 빛나게 합니다.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캐나다 원주민 가족(조의 가족)이 블루베리 따는 일을 하러 미국 메인주로 건너오는데, 어느날 대낮에 막내딸 루시가 사라지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루시를 마지막으로 본 오빠 조는 동생을 잃은 죄책감과 상실감에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가족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한편 메인주에 살고 있던 노마라는 소녀는 부유한 가정의 외동딸인데 계속 반복되는 악몽과 환상에 시달립니다. 소녀를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방식이 특별했던 부모님, 아버지의 무관심, 어머니의 과잉 보호는 소녀를 지치게 합니다. 그리고 가족들이 감추고 있는 집안의 비밀이 있음을 알게되고 조용히 그 비밀을 찾아 나섭니다.

이 말이 형에게 건넨 마지막 말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우리는 결코 내가 뱉은 말이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게다가 일은 이미 저질러졌는데 상대가 떠나고 없다면 화해하기도 힘들다. (117쪽)

이 소설 속에서 조가 찰리형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꺼져" 였어요.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루시에게 했던 마지막 말은

비밀을 지키라고 손가락을 입에 대고 말했던 "쉿!" 이었어요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사랑을 담은 말이나 격려의 말이 아닌 당혹감으로 얼룩진 분노의 말이었다면 남겨진 자의 남겨진 삶은 어떠할까요? 후회와 죄책감때문에 정상적인 삶을 살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가족을 떠나보낸 경험이 있는 분들 많이 있으실거에요.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지막도, 사랑하는 누군가의 마지막도 결코 미리 예측할 수 없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건네는 말이 어쩌면 그 사람에게 건네는 마지막 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바로 우리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다정해야 할 이유겠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행을 대신해 드립니다
하라다 마하 지음, 송현정 옮김 / 빈페이지 / 202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행이란, 무조건 직접 보고 느끼고 맛보고 체험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

었어요. 그런데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는 누군가를 위해 대신 여행을 떠나준다니, 굉장히 흥미롭고 신선한 소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면 현재에도 이미 '대리 여행'이 성행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여행 유튜버들이 우리가 가고 싶은 곳을 대신 다녀와서 멋진 경관과 유적지와 여행지의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벗어나 낯선 곳을 여행하고 싶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선뜻 떠나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죠. 떠나지 못하는 이유로는 일, 학업, 건강 상태, 여행 비용 등 말못할 각자의 사연들이 있을 거예요.

이 소설 속에서 누군가의 바람을 담아 여행을 대신 떠나주는 오카 에리카는 아이돌 출신의 한물간 연예인이었습니다. TV에서 여행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광고주의 이름을 잘못 말하는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프로그램은 폐지되고 유일했던 밥줄이 끊기고 맙니다. 소속 연예인이 오카 에리카 1명이었던 엔터테인먼트 회사도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죠. 그때.. 구세주처럼 누군가가 등장합니다. 지하철에서 팬이 전해준 편지를 읽다가 가방을 놓고 내린 오카 에리카, 그 가방을 들고 회사로 찾아온 중년의 여인이 오카 에리카에게 대리 여행을 제안합니다. 불치병에 걸려 병원에 누워 있는 딸을 위해 대신 여행을 떠나서, 벚꽃 핀 풍경을 보여달라고 거액의 돈을 들고 와 부탁을 합니다. 고민 끝에 그들의 제안을 수락한 오카 에리카는, 의뢰인을 대신해서 떠난 여행지에서 의외의 장면들과 사람들을 만나 오히려 자신의 상처도 치유받고 한층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대리 여행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사연 속에는 소중한 사람에게 전달한 간절할 메시지들이 담겨 있었고, 오카 에리카는 그들을 위한 사랑의 메신저가 됩니다.

여행은 정말 신기한 것 같아요. 여행에서는 다양한 걸 발견하기도 하고 누군가와 새롭게 만나기도 하지요. 떠나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몰라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일단 떠나보시는 건 어떨까요? 마음을 세탁하고 잠시 쉬어가는 거예요. (104쪽)

무의미한 여행은 없습니다. 저는 매일 여관에서 다양한 곳에서 각양각색의 목적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아무 목적 없이 오는 사람도 많고 무얼 하러 왔는지 모르겠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도 모두가 반드시 무언가를 찾아서 돌아갑니다.(159쪽)

바람 솔솔~ 여행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각자 여행을 떠나는 이유와 목적은 다르겠지만, '여행'이라는 단어가 주는 묘한 설렘의 감정은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사실 여행 당일보다 떠나기 전날이 더 설레긴 하죠^^ 어쩌면 이 두근거림을 마음껏 즐기려고 여행을 계속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121쪽) 마음을 비우기 위해서 떠났든,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 떠났든, 마음의 결을 다듬기 위해서 떠났든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는 항상 잔상이 남곤 합니다. 잔상 속에서 해답을 찾아낸다면 가장 베스트겠지만, 또 다른 질문을 얻어 돌아올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돌아오는 여행 가방 속에 무조건 소중한 한 가지는 담아 온다고 믿어요. 그 하나가 우리를 또 살게 할 거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엄마에게 안부를 묻는 밤 - 언제나 내 편인 이 세상 단 한 사람
박애희 지음 / 북파머스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엄마는 매일 라디오 작가로 일하는 딸이 맡고 있는 프로그램의 오프닝 멘트를 들으며 딸의 마음을 읽고 딸에게 안부를 전했습니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 주었던 이 세상 단 한 사람, 엄마가 61세의 나이에 희귀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박애희 작가는 살아있는 동안 눈부신 날들을 선물해주었던 엄마를 그리워하며, 추억을 떠올리며, 슬픔 사이에서 건져낸 기쁨들을 발견하고자 이야기를 엮어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어떻게든 견디고 살아내 우리를 키워낸 세상 모든 엄마에 대한 헌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쓰여졌다고 합니다.

엄마라는 이름은 가장 따뜻한 그 무엇이면서, 아무렇지 않게 상처주더라도 어차피 다시금 용서해줄거라고 믿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가끔은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잘못된 방식으로 상처를 주기도 해요. 이렇게요.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은 엄마는 면역력이 신생아보다 약해서 멸균관리와 소독을 철저히 해야 합니다. 작은 균 하나가 생명을 위협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흙이 잔뜩 묻은 대파를 다듬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본 딸은 분노가 치밀어 올라 폭발하고 맙니다. 도대체 몇번을 말해야 아느냐고, 언제까지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야 하느냐고 소리칩니다. 엄마는 말합니다. "내가 죽어야지....내가 빨리 죽어야지....."

자식들의 짐으로 전락한 당신의 처지를 비관했을 것입니다.

딸은 죽음에 대한 공포때문에....엄마가 빨리 떠날까봐 무섭고.....속상하고 두려운 마음에 엄마의 마음을 할퀴었던 것인데.....

저는 이 장면이 너무나 선명하게 그려져서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계속 뭔가가 울컥 울컥 올라와서 한동안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게 남은 세상의 엄마들이 한번쯤은 했을 말이거든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생명 연장 장치를 몸에 연결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같이할 것인가가 아닌, 얼마나 의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93쪽)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요즘 들어 깨달은 바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가 가장 행복해하는 일을 함께 좋아해주고, 그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요.

엄마와 내가 나눌 수 없었던 시간들을 지나오며 조금은 서러웠고 때로는 외로웠다. 하지만 나는 하나씩 배워나가고 있는 것도 같다. 부모를 잃는다는 것은, 칭찬과 보살핌을 바라며 응석을 부리던 아이의 마음을 보내고 누군가 없이도 스스로를 사랑하고 지키는 법을 다시 한번 깨우치는 일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나는 홀로서기의 시간을 통해 어른다운 어른으로, 한 사람의 엄마로, 오늘도 성장하는 중이다.(277쪽)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우주에 혼자 남아 부모 없는 고아가 될 시기가 옵니다. 그 시기가 되었을 때 제대로 된 어른으로 바로 서기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할지, 어떤 어른으로 홀로서기를 해야할지, 우리 삶을 무엇으로 채워나갈지,

고민하게 합니다.

매일 찾아오는 오늘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다, 어떤 날 불현듯 세상을 떠난 이들이 한 번 더 원했던 내일이 나의 오늘이라는 사실이 마음 깊숙이 다가올 때가 있다. 인생의 페이지가 한 장씩 줄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떠올릴 때면, 아끼는 책이 끝나는 게 아쉬워 천천히 읽던 어느 순간처럼 일상을 되도록 섬세하고 소중하게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그래야 언젠가 내가 사랑한 당신들이 끝까지 사랑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테니.(339쪽)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인생이 한페이지씩 줄고 있어요. 나이가 들면서는 한페이지씩이 아니라 뭉텅 뭉텅 줄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두렵기도 해요. 벌써 10월, 올 한해도 다 갔잖아요. 우리 삶을 섬세하고 소중하게 들여다 봐야 한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세상을 떠났지만 내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들을 다시금 떠올려 보고, 지금 내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부를 건네면서 우리가 끝까지 사랑해 내야할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여러분들~지금 바로 전화를 드세요.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따스한 목소리로 마음을 전하세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억의 낙원
김상균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 <기억의 낙원>은 인간이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생과 사, 의식과 인지능력의 한계를 기술로 사고팔 수 있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현실과 가상현실을 넘나드는 과학 서스펜스 소설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발할라'라는 인공지능 시스템을 통해 누군가의 삶의 마지막을 조작해, 바라고 원하는기억으로 만들어주는 것. 어쩌면 멀지 않은 미래에 실현가능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로 '조작몽 안락사'를 설계하는 일을 하는 '더 컴퍼니'에 장교수의 제안으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을 들여놓게 된 하람은,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의뢰인들의 바람과 이야기를 듣게 된다. 서비스가 잘 마무리되어 가족 중 한 명이 행복하고 평온하게 떠날 수 된다면 다행스럽게 생각해야 하는가. 완벽이나 최적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최악을 피하고자 하는 의뢰인들의 요구를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 행위가 불법적인 것이더라도 용인해야 하는지 두서없는 질문 속에서 방황한다. 하람은 남겨진 삶이 고통으로만 가득찬 이에게 조작몽 안락사가 마지막 선물이 될 수도 있을거라고 말하는 장교수의 신념이 설득력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법과 비윤리적 행위를 자행해도 된다는 뜻은 아닐 것이라고 의문을 갖는다.

한편 풍요와 쾌락이 넘치는 메타버스 세상인 '아르카디아'가 죽음 이후의 삶을 보장하는 공간으로 등장한다. 육신은 생체리듬을 멈추지만 사람의 뇌와 컴퓨터를 인터페이스에 연결(BCI)하여 '아르카디아'에 접속하게 하고 그 안에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설정이다. 그러나 그 안에 감옥으로 설정된 '안티고니아' 지역도 존재한다. 하람이 대학시절 상상했던 공간이 실제로 만들어진 것이다. 설립자인 장교수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삐뚤어지고 불안정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타인의 기억을 조작하는 일에 매달려 '아르카디아'라는 가상의 공간, 기억의 낙원을 만들었지만 결국 세상은 더욱더 뒤틀려 버렸다. 결국 아르카디아를 만든 발할라 시스템을 해체하면서 인간은 깨닫게 된다. '인간의 능력은 무한하다. 그러나 인간의 오만은 그 무한도 넘어선다'는 것을.

시한부 아내의 괴로웠던 삶을 행복한 꿈으로 마무리하려는 남편, 꿈이 없는 아이를 의사로 만들려는 부모, 자신의 가족을 파괴한 사람에게 복수하려는 여자, 가난한 이의 외국어 능력을 자식에게 이식하려는 부자 아빠. 죽은 아내를 메타버스 사후 세계에서 만나려는 남자. 이렇게 다양한 인간의 욕망을 들춰내 거래의 대상으로 삼는 '더 컴퍼니'라는 조직의 실체를 밝혀내려고 뒤를 쫓는 신문기자 소이와 '가이라'라는 비밀 단체의 추격전이 숨막히는 속도로 전개되면서 독자들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흥미로운 소설이다.

메티버스와 AI는 우리 삶에 밀접하게 접근해있다. 점차 발전하는 기술과 제도권 안에서 인간의 욕망과 욕심을 어떻게 조화롭게 디자인하고 직조해 나갈지 고민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인 것 같다. 윤리적 딜레마들과 부딪히고 파헤치고 깨달으면서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어떻게 설계해야할지 어떤 것들을 선택해야 할지 사유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다.


나는 기억과 현실의 경계에 서 있다. 그 경계는 희미하고 떄론 사라진다. 진실이라 믿는 것들이 허상일 수 있음을, 그리고 외면하는 것들이 진실일 수 있음을, 이 소설은 말한다.

(31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