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 피아노 소설Q
천희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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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자동피아노를 본 적 있다. 내가 아는 악기는 하나씩 연주해 가지 않는 이상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었고 그래서 그건 악기라기보다는 놀잇감 비슷한 기계 같았다. ‘답하는 자는 없고 되묻는 목소리만 있(26p)’는 것처럼. 영원히 한 장면만을 되 돌이킬 듯한 소리가 다만 시간이 다 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슬플 때 그 기억이 몇 번 떠올랐다.

슬픔은 자꾸 변주되고 그래서 매번 무뎌지지 못한다는 사실과 함께. 외면하지 않기 위해서 왜 그러는 거냐고 물었다. 답할 때마다 이게 정말 내 생각이 맞는지. 내가 어디서 본 감정을 연극하고 있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되물어야 했다. 나는 나를 믿을 수 없었다. 도 다음은 레. 그다음으로 넘어가는데 얼마나 큰 힘이 필요했는지.

 

가시밭에 발을 들이면 가시가 발바닥에 박힌다. 견디고 넘어서면 피가 멎고, 상처가 아물고, 더 단단한 발을 갖게 되기라고 말한 세계가 등 뒤에 있다.

가시 박힌 자리가 곪고, 곪은 자리에 다시 가시가 박혀, 썩어가는 발을 견디고 견디다 견딜 수 없어서. 나아갈 것인가. 돌아갈 것인가.

멈춰 서서 왜 아무도 내게 신발을 신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는지 물으면, 왜 신발에 대해 묻지 않았는지 되묻는 세계가 등 뒤에 있다. (42p)

 

그럴 때마다 세계라는 추상적이고 거대한 대상은 내게 힘은커녕 언제라도 나를 차도로 절벽 밑으로 세계 바깥으로 밀어버릴 수 있다는 듯 나의 등에 손을 대고 있다. 지금이 아닌 순간에 있는 나는 반드시 과거나 미래로 떠밀리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생각할 수 있는 건 거의 없다. 후회와 슬픔뿐이다. 후회해서 슬프고 슬퍼서 후회하게 된다. 둘 사이를 쏘다니다 보면 당도하게 되는 것은 시작도 끝도 아니다.

 

식탁 위에 놓여 있어야 할 것이 식탁 위에 놓여 있듯이, 죽음은 그냥 거기에 있었다.(56p)

 

그렇게 어떤 과거를 생각하게 된다. 한순간 되 돌이 킨 시간이 가리키는 곳에 온몸을 꽁꽁 감싼 모양으로 문을 닫고 슬픔을 가두던 아이가 있다.

 

창으로 들이치는 빛과 어둠의 세기, 두 뺨과 손끝에 느껴지는 공기의 온도, 공간의 밀도와 나를 둘러싼 사물들의 위치, 떠도는 냄새, 귓가를 흐르는 소리를 소란스러운 통곡 속에서도, 다정한 웃음 속에서도, 삼엄한 침묵 속에서도 나는 나로부터 한발 물러서서 그 모두를 관찰했다. 아픔이 찾아올 때 아파야 하는 줄 모르고, 슬픔이 찾아올 때 슬퍼야 하는 줄 모르고.(92p)

 

그것을 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도는 슬픔이고 레는 거품이라고.

돌아오는 슬픔과 첫 번째 음으로써

거품처럼 터지거나 사라지는 찰나에도 온갖 빛을 반사하는

아직 살아보지도 않은 계절에 이미 다녀온 것처럼(115p) 익숙한 슬픔을 그러나 매 순간 새롭게 받아들이는 나에게. 우리에게. 소설은 말한다.

이것은 허구가 아니다.

당신은 이것을 허구라 믿어도 좋다. (98-99p)

허구라 믿어도 좋을 만큼 벅찬 슬픔이 우리를 잡아먹는, 잡아먹히는 날이 종종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그럴 때면 누구의 손도 잡을 수 없을지 모른다. 누구의 손을 잡는 대신 그 손이 목을 졸라주기를 그럴 수 없다면 밀어주기를. 욕을 지껄이며 그런 기도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벅찬 슬픔을 한 번 빼내고 빼내다 지친 몸을 이끌고도 당신은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데도 멈출 수 없어서,(81p) 멈출 수 없었던 이유를. 그게 다만 공포와 슬픔이 아니고. 당신이 믿고 있는 믿음에 대하여. 당신이 믿고 있는 이유를. 당신은 당신에게 짧게 이야기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죽고 싶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단 한번만 진실하고 싶다. 목소리를, 나는 듣는다. - P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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