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식증 일기
발레리 발레르 지음, 박광수 옮김 / 아도니스출판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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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식증은 일종의 연습 같은 것이며하나의 목표다더는 다른 사람들처럼 존재하지 않겠다는 것이제는 물질적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겠다는 것절대로 복부 한가운데가 가득 채워진 것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며배고픔이라는 악마가 괴롭힌다고 느낄 때 경험하는 허위의 즐거움인 것이다.”

                    - 거식증 일기, 발레리 발레르, 박광수 옮김, 아도니스 출판, 2020, p224.


엊그저께밤을 새워 읽은 책이다이 작품은 21세에 사망한 영원한 젊은 작가발레리 발레르가 13세 때 겪은 거식증 체험담(허기 갈망), 정신병원 감금 생활을 15세 무렵에 쓴 병상일기, 세상에 대한 저항일기이다버지니아 울프는 일기를 쓰는 바람직한 태도는 자신만을 위해 쓰거나 모든 비밀을 안전하게 들을 수 있고 모든 동기를 옮게 평가할 수 있는 후대를 위해 쓰는 것이라고 했다발레르는 일기라는 내밀한 기록을 통해 자유가 박탈된 감금 상태에서 자신의 개인적인 정체성과 자존감을 잃지 않으려 분투한다.(일기를 쓰는 과정을 통해또는 그 물리적 증거를 통해 에릭슨이 말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남성세계에 대한 처철한 분노를 토해냈던 밸러리 솔래너스처럼 병원 체계(현대 세계 시스템)가족어른의 세계정상성이라는 일반적 가치에 대한 처절한 분노를 타인들에게후세에 증언하고자 몸부림친다사실그녀의 분노는 거의 독백과 침묵으포 표출된다그러나 로제 그르니에의 말처럼 때로는 침묵에는 그 어떤 말보다그 어떤 글보다 더 전복적인 힘이 있다그녀의 침묵은 거부를 욕망하는 필경사 바틀비와 맞닿아 있고그녀의 독설 가득한 독백은 인디언 추장브롬든(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의 현대 세계에 대한 통찰력과 일견 맞닿아 있다.


"가축 우리 같은 객차들, 오렌지색 시트가 깔린 기다란 좌석들, 그리고 암흑 같은 터널들. 이게 곧 자유라는 것이고, 바로 이런 것을 너는 원했다."(p301)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 발레리 발레르의 죽음은 명확하지 않다그러나 일찌감치 유서를 작성해 놓았고음식물을 바짝 날이 선 칼처럼 여기며섭취를 거부하고죽음을 소화하려고 애쓰며 죽음을 갈망했다는 점에서자살한 것으로 보인다그녀는 창밖으로는 조각난 하늘 밖에 보이지 않은 정신병동에서는 밖을 욕망했지만정작 밖으로 나왔을 때는 결코 밖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밖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결국 그녀에게 진정 밖은 세상 밖, 곧 죽음이었으리라... 

 어쩌면 정상의 테두리, 일반적인 기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평범한 우리가 미친 놈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흔히 새로 태어난 인간이 15세 무렵이 되면미친 세계에 나름 적응한 반쯤 미친 존재바로 우리와 같은 존재가 된다바로 이것이 우리의 현 시대가 정상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로널드 랭(R.D. Laing), 경험의 정치학(The Politics of Experience), 1967.)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낀 바지만, 우리는 너무 많이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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